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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의 향기

한국불교 근대화의 고승 학명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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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1-09 07:32 조회2,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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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근대화의 고승 학명선사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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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해니 새 해니 분별하지 말게나,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 속에 사네.

<세월>이라고 하는 한글선시(禪詩)로,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학명선사(鶴鳴禪師)는,
조선 고종 4년(1867)에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마을의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열대여섯 살에 이르러
가세가 점차로 기울어져
부모를 모시고 두 아우를 건사하기 위해
붓 만드는 기술을 익혀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스무 살 되던 해에
갑자기 부모의 상을 당했습니다.

인간사의 허무함을 느낀 선사는
부모의 장례를 다 마친 후,
붓상자를 메고 길을 나서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당도했습니다.

선사는 구암사에서
당대의 고승 설두(雪竇)화상의 설법을 듣고,
또 마흔 명이 넘는 제자들이
하나같이 수행정진하는 광경에
깊은 감명을 받고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선사는 방랑을 끝내고,
영광 고향마을로 돌아와
불갑사(佛甲寺)의
환송장로(幻松長老) 수하에서 출가하고
금화(錦華)선사로부터 계를 받으니,
계명은 계종(啓宗)이었습니다.

후에 금화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법호가 학명(鶴鳴),
선사의 속성인 백(白)과 함께
일반인들에게는
“백학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부터 선사는 열 해 동안
지리산 영원사, 벽송사와
조계산 선암사, 송광사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절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여러 산의 이름있는 선지식들로부터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을 널리배워 통달하였습니다.

학명선사가 금화선사의 뒤를 이어
구암사와 운문사에서 법강을 할 때,
제자가 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선사의 법랍 열두 해(서른 두 살)가 되던
1902년 가을에 돌연 법석을 떠나 ,
참선하는 곳을 찾아가서
몇 개의 포단(蒲團)이 닳아 헤지도록 정진에 몰두,
열 해가 넘는 세월을 지나고서야
부처님과 조사들의
입명(立命)한 경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무렵 학명선사께서
수도정진 중에 읊으신
오도송(悟道頌)을 읽어봅시다.

前生誰是我 (전생유시아 )
전생에는 누가 나였으며

來世我爲誰 (내세아위유)
내세에는 내가 누구 될 것인가

現在是知我 (현재시지아)
현재의 이 나를 알면

還迷我外我 (환미아외아)
미혹을 돌이켜
나 밖의 나를 알리로다

그 수행과정 중에도
학명선사는 부안 내소사와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주지 직임을
번갈아 타의로 맡아야 했으며,
특히 월명암에서는
선사를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이
수행 거처하는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요사채와 선실을 중건 또는 신축하는 일도
맡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선사의 법랍 스물두 해
(속세 나이 마흔두 살) 되는
1914년 봄에 운수행각을 떠나
중국대륙의 총림과 일본의 이름난 가람을
두루 돌면서 살피고 찾아,
때로는 중국과 일본의 이름난 선승을 만나
서로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였습니다.

이때 학명선사가
일본 임제종의 관장 석종연 선사와 만나
필담으로 한 선문답은
당시 동행한
아사히 신문기자에 의해 대서특필되어,
학명선사의 특출한 조사선(祖師禪)의 기풍이
일본 천하를 뒤흔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석종연선사가 학명선사에게 묻기를,
“그대 이름이 정녕 학명(학의 울음)일진데,
어디 한번 학울음소리를 내보라 !” 고 했답니다.

그에 학명선사께서는,
“ 늙은 소나무가지가 굽돌고 옹이가 많아서
발 붙일 데가 없나이다.“
라고 화답했다 합니다.

이에 석종연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이는 조선 고불(古佛)이로다 !”
하고 찬탄하며
부처님 뵙는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

학명선사가
변산 월명암에 주석하고 있을 때인
1919년 3월에
훗날 원불교를 일으켜 세운
소태산 박중빈이 찾아와
열흘이 넘도록 선사 곁에 머물며
불법을 물어 공부하면서
선사의 법설에 깊이 감복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고,
자신의 제자인
정산 송규(훗날 원불교의 2대 종법사)를
몇 달동안
학명선사의 시중을 드는
상좌로 맡겼다고 합니다.

또한 1923년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월명암이 가까운 한 토굴에 머물며
학명선사에게
“이제 그만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을 제도하시라”
는 간곡한 청이 담긴 시문을 드려,
선사로 하여금
하산하여 세간에 나오시게 했다고 합니다.

학명선사는
오랜 수행생활을 멈추시고 하산하여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기치를 걸고
정읍 내장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키고
선불교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이때 학명선사가 주창한
<내장선원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선원의 목표는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한다.

둘,
아침에는 경전을 읽고,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좌선을 함으로써,
스스로 참선하고 수행정진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

이 규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학명선사는
승려들이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하여
편하게 먹고 자며 수행하는 것을 경계하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게함으로써,
수행 과정에 있는 승려들로 하여금
보시(布施)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도록 했습니다.

학명선사는 또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시며,
창가에도 능하셔서
스스로 찬불가와 선법가를 지어
스스로 부르시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의 선사들과는 달리
한글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으셔서,
이 글 서두에 소개한
<세월>이라는 한글선시를
손수 붓으로 쓰고
가로 누운 액자 모양으로 만들어
제자들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또 학명선사가 그리신 달마도는
지금도 여러 고찰에 남아
보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학명선사는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어른입니다.



학명선사가 입적하신던 날 밤,
하늘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렸으며,
암수 한 쌍인 듯한 범이
애처로운 듯 표효하기 시작하였고
그 소리가 사흘 뒤에 멎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이듬해 눈 녹던 철 나무꾼들이
고내장(古內藏) 헐어진 절터를 지나다가
암수 두 마리의 호랑이가 범가죽이 되어
고스란히 누운 채 말라빠진 것을
발견하고 거두어들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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