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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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창건기

백양사는 노령산맥 끝자락에 호남평야를 마주하고 솟아 오른 백암산(741m)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 설계자인 정도전은 ‘이 산만은 장성 북쪽 30리에 있는데 이름을 白巖이라 하고, 혹은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석벽이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가 중첩하여 그 맑고 기이하며 큰 모습이 실로 한 곳의 명승지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백양사는 백암산 백학봉 아래 상왕봉, 사자봉, 금강봉, 월영봉, 수령봉 등 여러 봉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조선초 백양사에 주석하였으며 선종판사였던 晦堂 中皓는 백암사의 사세에 대하여 ‘우뚝한 산 빛은 항상 푸르게 솟아 있고 청정한 시냇물 낮에도 햇빛을 머금었네.’라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후손이자 애국지사인 宋秉璿(1836-1905)은 백암산이 ‘奇麗幽壯 爲南國名山’이라고 하였다. 薝園 鄭寅普(1893-?)는 ‘백양사는 본해 기인한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는데다가 건물과 구조가 그윽하고 아담하기 산수와 걸맞다.’고 하였다.

백암산은 전라남도 북쪽 끝에 있는 장성군 북하면에 소재한다.

장성 지역은 백제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백제 말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장성 지역의 불교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후대의 것이지만 백양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근현대 국학자인 담원 정인보는 ‘호남의 산들은 빼어났건만 거드름스럽지 않고 바다에 가까워 어여쁘고 어여쁜데 백암산이 문득 우뚝해라.’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1377년에 지은 「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의하면 ‘신라 때에 어떤 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白巖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후기 문신 洪鍾應(1783-?)이 185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양사의 「極樂殿佛糧禊序」에 의하면 ‘633년에 백양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異僧’은 대개 如幻으로 보고 있다. 즉, 근현대 불교학자인 無能居士 李能和(1869-1943)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壬辰에 신라 고승 如幻禪師가 梵宮을 개창하였다.’고 하였다. 退耕 權相老(1879-1965)는 ‘新羅 如幻祖師 開山道場’이라고 하였다. 鄭寅普가 1926년에 지은 「白羊寺紀蹟碑銘」에 의하면 ‘여환이 백제 무왕 때 창건하였다.’고 하면서 ‘如幻의 뒤로, 覺眞이 다시 넓히었고, 중간에 임진 병화로 재 된 걸 겨우 회복, 道巖이 계획했다네. 曼庵이 이 일을 이어 받아……옛날 盛時와 다름 없었으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632년(백제 무왕 33)에 如幻이 사찰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白巖寺라고 하였다고 간주해야 할 듯하다.

백양사의 절 이름은 백암사, 정토사(또는 정토선원)로 불리다가 현재의 백양사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백암사는 백제 무왕대 異僧 창건시의 명칭이며 宋 景平間에 淨土禪院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法豕가 1341년 지은 「白巖山淨土寺事蹟」에는 각엄존자께서 문도 등 산중의 碩德을 불러 모아 뒷일을 부촉하면서 ‘저 내 본사인 백암산 정토사는 삼남의 소금강’이라고 하여 정토사라고도 하였다. 「白巖寺轉藏法會堂司榜」에 의하면 정토사는 15세기에 다시 백암사로 불리었다. 중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토사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백양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과는 달리 백양사의 이름은 조선중기인 1574년(선조 7) 喚羊禪師가 정토사를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 읍지류인 「여지도서」 사찰조와 「장성부읍지」 사찰조, 불교 사지류인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여전히 ‘淨土寺’로 기록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정토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백양사를 중창한 道巖 印正(1805-1883)은 1840년(헌종 6) 이후 정토사를 중창하여 사명을 백양사라고 하였다는 사실에 무게감이 실리기도 한다.

이러한 백양사는 창건 이후 대체로 크게 다섯 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즉, 백제의 고승 여환이 백제 무왕때 백암사를 개창한 후 명종 대 승려 中延이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고쳐 ‘淨土寺’라 불렀다. 1350년(고려 충정왕 2) 覺眞國師 復丘가 3창하였으며, 1786년(정조 10) 喚惺이 4창하였고, 조선말기 고종 원년 道巖이 5창하였다. 그리고 근현대의 고승 曼庵이 6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양사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창건 이래 여말선초의 시기에 수선사 제13세 사주 각진국사 복구 이후 고성이씨 가문 출신의 승려들에 의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암사는 高麗 侍中 杏村 李文貞公의 願刹인데, 그의 아들 平齋 文敬公과 손자 容軒 國老가 각기 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억불의 시기인 조선후기에는 청허 휴정의 문도 편양 언기의 적손인 喚醒 志安(1664-1729)의 문손들이 호남지역 불교계를 주도하여, 백양사의 운문암은 ‘北摩訶衍 南雲門庵’이라 불리듯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특히 근현대의 고승 曼庵 宗憲(1876-1956)과 西翁 尙純(1912-2003)을 비롯한 백양사 출신이 종정으로 선출되고 현대 불교계를 주도한 고승들을 배출하는 등 6대 불교총림이었다.

앞서 언급한 운문암을 비롯한 물외암과 영천암은 고려 말에 사세를 크게 진작시킨 覺眞國師 復丘(1270-1355)에 의해 창건되었다.

복구에 의해 창건된 백양사의 누정인 쌍계루는 牧隱 李穡의 기문과 圃隱 鄭夢周의 詩가 縣額되면서 대대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 조선시대 210여 명의 문인들이 남긴 題詠詩는 240여 수에 달하고 있다. 그 외 산내 암자로, 天眞庵은 1644년(인조 22) 白谷 處能(1617-1680)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金剛庵은 1892년(고종 29) 경암이 창건하였고, 서양암은 1915년 비구니 치호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백양사는 초창 이후 중연이 중창하였다.
宋 景平間에 이르러 淨土禪院이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문손도인 中延선사가 이를 이어 殿堂과 門廡, 丈室, 賓僚 등 80여 칸을 다시 짓고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왔다.

중연은 백양사 전각 80여 칸을 짓는 등 백양사 가람을 중창하였다.

1378년 3월 23일 작성된 문서에 의하면 중연이 중창한 당시 백양사의 전각은 法堂 3칸, 東俠藏堂 2칸, 犯隅學寮 3칸, 副舍 1칸, 客樓西俠室 2칸, 下隅食堂 3칸 食廚 1칸, 法堂南斜廊 5칸, 上房 1칸 廳 1칸 侍奉房 1칸 기타 堂舍 85칸이었다고 한다.
신라 때에 어떤 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白巖寺로 했었다고 한다. 宋 景平間에 이르러 淨土禪院이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문손도인 中延선사가 이를 이어 殿堂과 門廡, 丈室, 賓僚 등 80여 칸을 다시 짓고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그 절을 맡게 되니 그 初法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이다.
<寺乘>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임진에 신라의 고승 如幻 선사가 梵宮을 개창하고 고려 덕종 3년(1034) 갑술에 中延선사가 정토법문을 선양하기 위하여 정토사로 이름을 고치었다.

담원 정인보가 33세인 1925년에 백양사 승려 舟峰이 같은 사찰 주지인 만암의 말을 빌려 전한 기록에 의하면 ‘옛 기록을 상고하건대, 이 절이 창건된 것은 如幻에 의해서니, 실로 백제 무왕 때의 일이요, 무너진 절을 물려받아 크게 일으킨 분으로는 고려 때 중연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하였다. 백암사의 승려 중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승려는 별도의 敎가 없이 焚修하고 祝聖하는 자입니다. 지금부터 9년 전인 戊申年(1188, 명종 18) 7월쯤 祝聖을 위한 觀音尊像을 조성하러 발원하며 잘 맞이해 놓을 곳을 왕께 주청하온 때에, ‘僧이 처음으로 짓는[造排] 장성군 땅 白巖寺에 봉안시키도록 落點하신 것을 말미암아 봉안하고, 이 절은 이미 殘亡한 산기슭[山枝] 5결로서 나뉘어서 8곳의 田과 處所이던 것을, 한 칸도 버림 없이 고쳐[改排] 온 바로 祝聖法席을 길이 행하고 이제 萬日 焚修를 시작하도록 하사되’라고 했습니다.

당시 백양사는 이미 쇠락하였지만 소속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중연이 1188년(고려 명종 18) 7월경 명종을 위해 관음상을 조성하여 백암사에서 봉안하고 祝聖法席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양사를 중창한 중연의 이름이 보이는 기록은 1198년(고려 신종 1) 3월 23일에 長城監務官에서 長城郡司로 발급한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1198년 「監務官貼官貼」에 의하면 中延은 백양사 중창할 때 斯備를 寺主로 삼았으며 中延의 法孫으로 공인받기 위해 첩을 발행하였다. 즉, 聖住寺 住持 性照 中延이 올린 所志로 말미암아 왕께서 판부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퇴락한 백양사를 중창한 중연은 성주사 주지로 호는 성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197년(고려 명종 27)부터 1205년(고려 희종 5)까지 9년간 수선사 중창시 白巖寺 승려였던 性富가 ‘평생 梓匠으로 업을 삼았는데 법을 듣고 발심하여 염불을 일삼었던 바, 이 절은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수선사의 중창은 수선사 승려 覺純과 더불어 9년간 이루어졌는데, 백암사의 승려 性富의 설계와 기술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백양사와 수선사와의 관련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고려 원 간섭기 백양사를 중창하였던 수선사 제13세 복구와 마찬가지로 백양사와 수선사 간에 교류가 깊었던 듯하다.

1198년 「長城監務官貼」에 의하면 백양사는 중연의 법손 斯備에 의해 계승되었던 듯하다.

즉,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절을 맡게 되니 처음의 법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백양사의 사세는 알려진 바 없으며 원 간섭기 말 이후 조선 초까지 각진국사 복구와 그의 문도들이 주도하였다. 복구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10세에 수선사 제5세 사주 원오국사 천영에게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다. 수선사 제8세 사주 慈覺國師 道英 대선사에게 10여 년간 사사하였는데 21세 승과에 합격한 후, 월남사, 송광사 등의 사찰에 가기 전 ‘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10여 년이나 밤낮으로 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도전의 「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문계인 中延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절을 맡게 되니 처음의 법도를 잘 이은 것이다. 우리 王師인 覺儼尊者에 이르러서는 나이 겨우 8세에 一麟公을 좇아 살다가 뒤에 松廣寺 圓悟國師에게 들어가 현지를 참구하여 법기를 대성하고 月南寺 주석을 비롯하여 20여 년간 松廣寺 주석을 거치는 동안 그 도가 대흥하였다.……또 尊者는 一麟公의 뜻을 잊지 않고 옛 것을 철거하고 다시 새롭게 하였다.

복구는 수선사 제5세 사주 원오국사 천영에게 가기 전인 8세에 백암사 一麟에게 사사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一麟은 중연의 문손 법손 斯備 이후 원 간섭기 백암사에 주석하였던 승려였다. 복구는 백암사 일린에게 사사받고 수선사에 가서 천영과 도영에게 다시 사사받았다. 후에 수선사 제13세 사주(1322년경-1350)가 되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백암사에 다시 머물다가 입적하는 등 수선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복구는 수선사 사주가 되기 전 처음으로 사사받았던 백암사를 중흥시켰다. 복구는 ‘한탄할 일은 이 절의 창건이 오래되어, 절의 모든 집들이 다 타락하고 佛像과 法寶 및 天人像이 모두 이지러져 거의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자는 곡식과 비단을 내고, 가난한 사람은 노역을 해서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 한결같이 모두 새롭게 해 나갔다.’
정도전의 기문에 의하면 ‘또 존자는 一麟公의 뜻을 잊지 않고 옛 것을 철거하고 다시 새롭게 하였는데, 그 비용은 모두 당신의 바랑[鉢囊之資]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의 문인들이 도운 것도 많았다.’고 하였다. 당시 백양사의 중창은 복구를 비롯해 문인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議政府關字傳書」에 의하면 복구의 조카 杏村 李嵒(1297-1364)의 사재를 기울여 중창하였다고 한다. 중창으로 ‘몇 년 안 되는 사이 寶刹을 열고 佛殿을 세우니 金壁의 빛남과 象設 鐘鼓의 엄숙 화려함, 僧房 및 각 집의 고요하고 그윽함과 三門과 廚庫의 크고 빛남, 담장[墻垣] 및 섬돌[階砌]의 곱고 정밀함과 밥상[床敷] 그릇[器皿], 이불[茵褥] 같은 일용품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백양사는 弘揚佛教에서 ‘祝釐佛敎’를 하는 곳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다. 중창을 하여 불보는 갖추었지만 법보의 사찰이 되기 위해 복구의 문인 心白과 智孚 등을 송에 보내 대장경을 구입하여 가져오게 하여 1년도 안되어 大藏殿을 짓고 봉안하였다.
今 相國 洪綏와 더불어 同心共願으로 각각 淨財를 내어 문인 心白과 智孚 등에게 바다를 건너 송나라로 들어가 대장경을 갖춰 오도록 하였다. 1년이 못 되어 바다 건너서 대장경을 구해오고 옻칠 장과 香囊, 紗幅 등 모든 장엄구가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1341년 낙성을 기념하여 轉藏法會를 개최하였다.

心白은 主寺營辨으로, 智孚는 幹大藏의 직임을 맡았다. 여기에는 재상 洪綏가 함께 願을 세워 재원을 마련하여 지원하였다. 홍수는 친원파인 洪福源의 아들 洪茶丘의 아들이며, 그의 막내 동생이 明理和尙이었다. 명리화상은 ‘그의 누이가 원의 寵臣인 이라치[亦剌赤]에게 시집을 가자, 따라가 마침내 이라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므로 원에서 「대장경」의 확보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복구는 건물과 부대시설을 완성한 후 결여된 法寶를 구하고자, 宋에 문도들을 파견하여 大藏經을 마련토록 했다. 이를 위해 3칸 규모의 大藏殿을 조성하여 봉안토록 한 듯하다.

1353년 제3차 전장법회에서는 心白前白巖社主로 나타나고 있다.

제1·2차 전장법회는 復丘가 주맹하였으며, 제3차 전장법회는 수선사 제14세 사주 復庵淨慧가 주맹하였다. 「白巖山淨土寺轉藏第三回榜」에 따르면 淨慧도 역시 復丘의 문도였으며, 粲英은 정혜의 제자였다. 息影庵은 수선사의 분원이었던 선원사의 승려로서, 蒙山德異의 제자인 鐵山紹瓊을 직접 모시고 온 雪峰國師 冲鑑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의 문도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복구의 문도는 비문에 의하면 ‘元珪와 禪源·白華·迦智·麻谷 등 1000여 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복구의 문인으로 알려진 승려는 「1357년 승록사 첩문」에 의하여 더 찾아진다. 즉, ‘大禪師 須彌, 禪師 祖□, 禪師 覺瑚, 中德 白盖, 中德 覺曒, 大選 汲深, 大選 戒氷’ 등이 있었다.

연구에 의하면 수선사 제10세 사주 혜감국사 만항과 雪峯 圓明國師 冲鑑(1274-1388)에 의해 받아들여진 몽산선풍은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와 그의 문도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충감의 제자이면서 나옹의 고제인 竹磵 宏演도 제2의 수선사인 선원사 주지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양사 쌍계루의 기문을 청할 때 청수와 함께 하였던 無說 逌至였다. 無說 逌至는 演西堂이라는 호를 지녔다. 이는 태고 보우가 演西堂이 無說이라는 두 자를 題號로 정하였다거나, 목은 이색의 다음 詩題 가운데 ‘演無說’라는 글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색이 수안방장에서 승려 演無說과 聶伯敬과 함께 자리를 하였는데 ‘丹丘先生은 필법이 대단히 신묘하고 竹磵老禪은 시어가 새롭구나.’라는 시를 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演無說은 竹磵 宏演인 것이 확실하다.
이렇듯 복구의 문도들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주요 역할과 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복구의 입적 직후인 1357년 복구의 문도들과 관계없는 若雲이 주지로 임명되어 그의 문도들이 백암사를 장악하자, 복구의 문도와 후손인 右副承宣 李岡 등이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이를 저지시켜 축출하였다.

그 후 백양사는 복구의 조카인 淸叟가 계승하게 된다.

청수는 이우의 3남이자 杏村 李嵒(1297-1364)의 막내 동생인 梅村 李澄이다. 「고성이씨족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찾아진다.
李澄 初名君保 性淸秀善松雪體 官至密直 號 梅村 出家號雲庵大禪 一云 梅堂和尙 恭愍朝人也

李澄은 초명이 君保였으며 性情이 淸秀하다고 하였다. 이에 호가 淸叟라고 불린 게 아닌가 한다. 이징은 조맹부의 송설체에 능하였으며, 密直의 관직에 올라 호를 梅村이라고 하였다. 출가 후 법명이 祖澄이며 雲庵(雲巖, 雲唵) 또는 梅堂화상이라, 三重大匡 福利君에 책봉되었다. 祖澄은 앞서 언급한 무설의 제자 祖明과 도반일 개연성이 높다. 청수는 그의 스승이자 삼촌인 복구가 ‘절을 부탁하여 뒷일을 맡게 하였다.’고 하여 그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佛菩薩 천인의 형상이나 經唄鐘磬의 선양과 곳집의 수입과 같은 것이 옛날에 비해 배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경술년(1370) 여름에 비가 심하게 와서 계곡 물이 넘치니, 누각이 미친 듯한 물결에 휩쓸려 붕괴됨에 청수는 다시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이를 이루어 내었다. 갈고 깎은 것이 법도에 맞고 채색도 알맞아 검소하지도 사치하지도 않다. 날마다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으니, 이 누각을 지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나와 자네가 다행히 누각 위에서 만나 친히 둘러보았는데 그냥 말없이 갈 수 있는가 하면서 기를 청하였다.
경술년(1370)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樓도 무너져버렸다. 淸叟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쌍계루는 청수의 스승 복구가 지은 것인데 1370년 여름에 폭우로 계곡에 물이 넘쳐 쌍계루가 무너져 버리자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다시 지었다.

그런 후 청수는 絶磵을 통하여 그 누각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였다.
李穡의 淨土寺 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지은 기문을 보였는데 자세하지 않으므로 이색에 다시 부탁을 하였다.
幻庵스님은 書法이 절묘하여 眞體를 터득하였다. 한때 그의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지만 반드시 시문을 보고 마음에 흡족해야만 붓을 들었다. 雲庵澄公 淸叟가 장성부에 있는 白巖寺의 樓閣을 중수하여 三峰 鄭先生에게 樓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三峰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雲庵의 문도인 絶澗倫師로 하여금 幻庵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 幻庵이 ‘이는 내가 쓸 만한 글이 못됩니다. 牧老가 세상에 계시는데 감히 누가 장문의 대작을 짓는단 말입니까’하였다. 그리고는 沙彌僧을 絶澗에게 보내 목은에게 가서 누각의 이름과 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牧隱이 絶澗에게 물으니 絶澗은 ‘절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고, 물은 절의 남쪽에서 합쳐집니다.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은 멀기 때문에 그 수세가 크고 작고합니다. 그러나 합수가 되어 못이 된 뒤에 산을 빠져 나갑니다.’라고 하였다. 牧老가 말하길 ‘그러면 雙溪樓라하면 되겠군.’하고는 붓을 들어 기를 썼다. 그 글은 한 점 더할 것도 없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내가 늙었구나, 밝은 달빛이 누각에 가득해도 하룻밤 그곳에서 묵어갈 수 없으니, 젊어서 길손이 못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幻庵이 글을 받아썼다.

청수가 정도전에게 누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자 ‘克復’이라 이름을 짓고, 청수의 문도에게 ‘기문은 환암에게 받으라.’고 하여 절간이 사미승과 함께 환암을 찾았다.

이에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받게 하고 자신은 누각의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이렇듯 환암도 백양사에서 머물렀던 듯하다. 이는 환암의 侍子였던 慶觀이 시를 남긴 사실에서 충분히 유추된다. 이에 의하면 경관은 법호가 ‘中谷’이었다. 경관은 환암의 비문에 湛圓, 紹安, 卍雨 등과 함께 등장하며, 환암이 국사 책봉을 꺼리자 수용하게 한 환암의 侍子였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에는 앞서 언급한 무설 죽간 굉연이 함께 하였다. 무설은 1375년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祖明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정도전(1342-1398)은 나주 유배기간 나주 聳珍山(해발 349m)에서 ‘湧珍山 湧珍寺克復樓記’를 지었다. 이 克復樓에 竹澗(竹磵) 宏演 無說이 記를 남겼는데, 그는 쌍계루에도 올라 시를 읊었다.
굉연은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조명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특히 김구용의 동생인 金齊顔(?-1368)도 無說에게 준 詩가 남아 있다. 무설은 특히 이색과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청수가 지은 누각에서 만났었는데, 유배 후에 다시 누각에 와서 무설이 지은 기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설은 원에 유력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북으로 燕都에서 놀고 남으로 江浙를 떠돌며 泗川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명산거찰이라는 곳은 거의 다 실컷 보았다.

위의 기문에서 보는 것처럼 무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원에 유력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처럼 그(竹磵 宏演)는 나옹의 고제로 幽谷 覺宏, 無及 覺信, 野雲 覺玗, 仲英 覺雄 등과 같이 원에 유력하였다. 혹 중국의 문집에 의하면 無悅이 원에 유력하였다고 하는데, 동일 인물이거나 도반일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수의 문도인 듯한 絶磵 益倫은 ‘삼봉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운암의 무리인 絶澗 倫師로 하여금 환암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에 의하여 더욱더 확실히 알 수 있다.
三重大匡 □군 雲菴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에 부탁하여 雙溪樓의 이름을 지었다. 또 三峯 鄭氏가 지은 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按] 李穡의 淨土寺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하였다.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絶磵 益倫은 혜근의 문도 가운데 竹磵 宏演과 더불어 ‘磵’字를 쓴 대표적인 인물이다.

松風軒이라는 당호로 불렸으며, 천마산 지족암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는 1376년부터 古菴 日昇이 주지를 맡기까지 회암사의 주지로 있었으며, 당시의 문인 이색에게 「檜巖寺修造記」와 「長城白巖寺雙溪樓記」라는 기문을 청한 바 있다. 그런데 이색이 「檜巖寺修造記」를 쓸 당시인 1379년(고려 우왕 5) 무렵에 주지 絶磵 益倫과 覺田이 후속불사를 담당하였는데, 나옹이 주도한 중창 불사 시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絶磵은 혼수가 주관한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靑龍寺에 가서 혼수를 만나 글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에 이르러 환암의 비문 건립에도 참여하였고, 法王 華嚴宗都僧統 雪悟와 나옹의 문도인 絶磵 益倫도 무학 자초와 더불어 태종대 함흥에 머물고 있는 이성계를 환궁하게 하여 이성계 세력과 태종 세력과의 알력에서 빚어진 갈등을 푸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신사년(1341)봄에 제산의 석덕을 불러 모아 轉藏法會를 닦음으로써 낙성하였다. 문인 牧 등이 각기 한 가지 씩 일을 맡아 慶讚會를 베풀되 오직 근엄하게 하였다. 경찬회 첫날 伽梨和羅 등의 물건을 베풀며, 약 10일간 修法하여 布施 功德住를 遷度함이 풍성하였으며, 粧校를 건 것도 특수하여 士女와 老幼가 修敬함이 지금과 같은 것이 예전에는 없었다. 나 法豕는 대중의 維那직책을 맡아 성대한 일을 보고 감히 이 榜을 들어 祝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회에 나아간 禪流를 아래에 열거한다. (至正 元年 辛巳(1341) 四月 日)

백양사 경찬회는 1341년 4월 복구의 문인 牧과 維那 法豕 등이 주관하여 인근 사찰의 승려들을 불러 모아 개최하였다. 그 후 1348년, 1353년, 1409년에 각기 실시되었다.
여말선초 백양사의 사세 규모를 짐작케 하는 것으로 전장법회에 참여한 규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양사를 비롯해 전라도 인근의 승려들이 100여 명에서 150여 명 가량 참여한 규모였다. 즉, 1341년(고려 충혜왕 2) 제1차 전장법회에 知識 83명과 道者 70명, 제3차 전장법회에 知識 46명과 道者 52명, 1409년 제4차 전장법회에 知識 55명과 道者 45명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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