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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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중창기

1393년(태조 2)에 작성된 백양사 소장의 한 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 백양사의 사세를 짐작케 한다.

즉, 「白嵓寺傳帳受」의 백양사의 전각을 주제별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즉, 丸器庫, 漆器庫, 鋪陳庫, 布貨庫, 穀食庫, 燈油寶庫, 文書庫, 間閣庫, 佛寶庫, 法寶庫, 佛藏庫, 鍮銅鐵庫 등으로 나누어 운용하였던 듯하다. 백양사 ‘灯油寶·靜庵和尙忌日寶·大藏寶·長年寶·長灯寶’라는 기록에 의하면 1407년 무렵에 寺院寶가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진국사 복구와 조카인 文貞公 李嵓(1297-1364)이 발원하여 사재를 들여 대장경을 봉안하고 가족의 長年寶와 大藏寶, 忌日寶의 비용이 모두 300석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間閣庫」에 의하면 태조대 당시 백양사의 전각은 彌陀殿(3칸)과 大藏殿(3칸), 鐘樓殿(3칸), 三寶(2칸), 大稤(3칸), 監院房(多), 東司(2칸), 僧堂(5칸), 沙門(1칸), 上室(6칸), 侍者寮(3칸), 寮連(12칸), 客寮(3칸), 㕑舍(3칸), 食堂(3칸), 洗閣(3칸), 樓橋(3칸), 中行廊(3칸), 南行廊(10칸), 砧家, 馬厩(3칸) 등이었다. 1393년(태조 2)에는 76칸 이상으로 11세기에 비해 크게 감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촌형인 전에 兩街에 있었던 中晧가 傳住하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作法하며 祝上하옵던 때 慈恩宗의 中德 戒天이 長城邑에 원래 속해있던 資福寺는 버려두고 한번 휴식을 취할 정도의 거리에 있는 同 白巖寺를 자복사에 求望하여 關字를 함부로 받아 가지고 내려와서 前의 寶長과 色掌들이 모두 쫒아보내고 同 寶長 등의 임의로 임명하니 各村에 資福을 정하는 뜻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암사는 固城 李氏 文貞公 杏村 李嵒(1297-1364) 내외손들의 원당이었는데 1407년 무렵 백양사의 경영권이 慈恩宗의 中德 戒天 등에게 넘어갔다. 이에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장성 감무에 이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는 資福寺가 되었다고 하나, 국가에 의해 지정된 것은 아닌 듯하다. 세 달 후인 1407년(태종 7) 12월 2일에 여러 읍의 자복사를 지정하였는데 장성의 자복사로 백양사가 국가 지정 자복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읍에서 지정한 자복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09년에는 제4차 전장법회가 개최되었다. 主法 前興天社主 悟世如幻圓照無 證道利生 大曹溪宗師 眞應尊者 熙嚴의 주관 하에 大維那 普智圓明大禪師 覺圓, 記事 熙演·海證, 首堂佐 信禪 등이 실무를 맡았다. 覺圓이 기록한 「白巖寺 轉藏法會 堂司榜」에 의하면 堂頭 즉, 주지는 前兩街都僧錄大師 慈慧圓融大師 晦極과 華嚴契內 前龍泉社主 法蓮과 더불어 왕실과 만민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전장법회를 개최하였다. 主法 前 興天社主悟世如幻圓照無礙證道利生大曹溪宗師 真應尊者 熙嚴을 위시하여 우바새․우바이 등 속인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晦極은 승록사의 최고 승직인 兩街都僧錄을 지낸 고승이며, 전장법회를 주관한 책임자는 전 흥천사주 真應尊者 熙嚴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 후 抑佛崇儒 시책이 단행되는 분위기 하에서도, 백양사는 불교의 사세를 진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中皓는 호가 晦堂으로, 백양사 주지로 있다가 1426년(세종 8)무렵 천태종 각림사 주지에 재임하였다. 중호는 1426년(세종 8) 천태종이 선종에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判禪宗事였다. 1445년(세종 27) 무렵 선종판사였던 松隱 學蒙은 고려 말 시중 杏村 李嵓 (1279-1364)의 외종손이었으며, 이암의 외현손인 高第 道庵과 白奄寺에 주석하였다. 즉, 중호 이후 선종판사는 中演(세종 15년 무렵), 行乎(세종 20년 무렵), 卍雨(세종 25년 무렵)이며 이후 학몽이 선종판사였다.
또 경기도 監司에게 유시하기를,……또 驪興 神勒寺에는 文度公의 影幀을 모셨는데, 의지 없는 雜僧들이 잘 수호하지 못하여 형편 없이 되었다기에, 이제 전라도 長城 白巖寺의 승려 學蒙을 들어가 살게 하였으니, 잘 安接시켜 주게 하라.

이와 같이 고려 말 이존비의 집안인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수선사 제13세 사주 각진국사 복구를 비롯한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당대의 문인 사가정 서거정이 학몽의 족질이기도 하였는데, 학몽의 수제자인 道庵도 고성 이씨 가문 출신이었으며, 도암의 문도는 守伊이다. 도암은 서거정(1420-1488)보다 다섯 살 아래이므로 1425년 출생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守伊는 涵虛堂 己和(1376-1433)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울러 도암 역시 후대에 백양사를 중창한 道巖 印正(1805-1883)과 다른 인물이다. 도암은 李輯, 서거정과 함께 행촌 이암의 외현손이었으며, 楊州 佛巖里 사람인데, 서거정의 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백암사는 高麗 侍中 杏村인 李文貞公의 願刹인데, 그의 아들 平齋 文敬公과 손자 容軒 國老가 각기 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승려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外曾孫인 判禪宗事 松隱 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高弟가 바로 道庵 成上人인데 松隱이 道庵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道庵도 山門에서 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들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도암을 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인하여 생각하건데 서거정이 예전에 興天寺로 松隱을 찾아뵈었더니, 松隱이 서거정을 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松隱에 대한 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松隱은 다시 白巖寺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서거정이 설을 지어서 도암을 통하여 부쳐 드렸더니, 뒤에 松隱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道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松隱이 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松隱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으나, 道庵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당시 백암사의 주지는 成萬德이었는데 그 다음의 주지직을 도암이 맡았다. 도암은 田上人과도 친밀한 사이였으며, 도암의 도반이 도명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洪鍾應(1783-?)이 지은 「極樂殿佛糧禊序」에는 문정왕후가 향과 축문을 써서 4대 왕의 묘호 및 정승, 國舅, 공주 순으로 극락보전에 위패를 두어 승려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였다. 문정왕후(1501-1565)는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된 이후 백양사에서 國魂祭를 설행하였다. 그 후 백양사에서는 왕실을 위한 축원이 이루어졌다.
백양사에는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한 청허 휴정(1520-1604)의 문도들이 주석하였다. 청허의 문도인 소요 태능, 진묵 일옥, 기허 영규 등이 바로 그들이다. 逍遙 太能(1562-1649)은 ‘13세 때 백양산에서 놀다가 物外庵에 와서 속세를 벗어날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性眞大師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經律을 배울 때에는 그 뜻을 철저히 밝혔다.’고 한다. 소요는 白羊山 물외암의 性眞大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또한 雪潭 自優(1769-1830)의 「夢行錄」에 의하면 소요는 만년에 정토사 香閣에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청허 휴정의 문도인 震黙 一玉(1562-?)은 임진왜란 직전에 백양사 조실로 있었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이 소요와 진묵은 임진왜란시 의승으로 참전하지 않고 수행으로 일관하였지만, 白巖寺 僧 處能과 영규 등이 의승전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1592년(선조 25) 7월20일 長城 南門(현재의 북일면 오산) 의병 봉기시 백암사의 승려들도 참전하였다. 󰡔남문창의록󰡕에 따르면, 그들은 1592년 금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격문을 낸 김경수(1543-1621)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호남 오산 남문창의비」에는 의승장 處能·啓默·戒閒·德仁·慈惠·義寬·處閒·學仁·惠仁 등 9명이 기록되어 있다.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 白岩寺·修道寺·鷲棲寺, 진원 下淸寺, 고창 文殊寺, 흥덕 烟起寺, 담양 玉泉寺 등 장성 인근 사찰의 승려 105명이 참전하였다. 1592년 7월 25일에는 장성 白巖寺 處能을 비롯한 修道寺 啓默, 鷲棲寺 戒閑, 진원 下淸寺 德仁 등이 장성 의병청에 합류하여 참전하였다.
백양사 소장 문헌 󰡔白羊寺四明日薦靈戰亡錄󰡕(불기2957년 경오 4월 작)에 ‘義兵僧將 通政大夫 靈圭, 義兵僧將 通政大夫 希黙, 義兵 僧將 印眞’이 권율, 이순신, 조헌 등 순국 의병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靈圭와 希黙, 印眞 등 의승장을 비롯한 의승들은 백양사와 내장사 등에서 참전하였던 것이다.
白羊寺雲門庵創修事蹟 「第1重刱記」에 의하면 1597년 왜군이 백양사 근처인 笠巖鎭에 침략해 오자 이에 항전한 듯하다. 이 전란으로 인해 백양사가 훼손되어 1624년까지 28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선조대 무렵에 기근과 역병이 돌아 민들이 많이 죽자,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해 백양사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는 백양사 뒤의 학바위에서 고려 때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천제를 지냈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소요 태능의 高師인 如如子 知白 繼愚가 1627년에서 1631년(인조 9)까지 백양사 운문암을 중창하였다. 여기에는 인조의 어머니인 仁獻王后의 대시주로 이루어졌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양사 운문암에는 阿彌陀九品會圖와 불상 그리고 인헌왕후의 영정이 봉안되었다.
그 후 백양사는 1857년(철종 8)에 대원군의 봉산원당이 되었다. 封山이란 胎室이 있는 산 주위에 禁標를 세우는 것이다. 봉산은 왕이나 왕비의 陵墓를 보호하고 胎를 묻기 위한 胎封封山과 栗木封山, 香炭封山 등으로 나뉘며, 원찰이 있는 산은 거의가 봉산으로 지정되었다. 백양사에도 1856년(철종 7)부터 1887년(고종 24)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完文과 節目 등이 발급되어 僧役이 減役 및 免役 되었다. 백양사는 封山願堂으로서 四山에 禁標가 세워져 보호받음으로써, 벌목 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한편 백양사는 지금의 쌍계루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864년(고종 1) 홍수로 사찰 전체가 휩쓸려 내려가면서 道巖 印正(1805-1883)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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