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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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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02 13:21 조회1,8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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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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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05.

가을바람이 단충을 처음 붉음으로 바꾸다


삽살개 눈썹에 검은 누더기의
한 어리석은 중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시내를 따라 걷는 걸음이 능숙하구나.

운연(雲煙)을 관망하니 깨고 또 취하고
신변을 놀려 희롱하니 어긋남이 도리어 더하도다.

가을바람이 가만히 단풍을 처음 붉음으로 바꾸고
가을달이 바야흐로 밝으니 물이 더욱 맑도다.

범부와 성인을 모두 잊고 한가히 젓대를 불며
거꾸로 수미산을 타고 자유자재하게 오르도다.

尨眉緇衲一癡僧
倚杖隨溪步自能
看到雲煙醒又醉
翫弄神變錯還增
金風暗換楓初紫
秋月方明水愈澄
凡聖都忘閑吹笛
倒騎須彌任運登


불교는 원래 인도의 브라만교를 초월해서
인간 본래의 참모습을
구경적(究竟的)으로 밝혀
인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깊은 불교의 근원을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실천해 온 것이
선(禪)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은
불교의 종교적 생명체라고도 할 수 있고,
교(敎)를 초월하여 그 근원에서 자유자재한
참사람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선의 큰 뜻은
망식(妄識)을 탈각(脫却)하고
참된 자아(自我)를 스스로 깨닫는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참나’가 아닌 망식으로 얽혀 있는
고통스럽고 허망하며
분열과 불안을 가져오는 아집(我執)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이 한정된 자아의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해야 한다.

가끔 참선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올바르게 참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고 한다.

그러나 참선공부만큼
분명한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참선, 참선하니까
모두 어렵고 특별한 종교수행으로 알고 있는데

참선이란
욕망과 아집으로 뭉쳐진 삶을
근원적으로 비판, 탈각해서
진실하고 자비롭게 살자는 것이다.

쉽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주관적(主觀的)인 틀에
맞추어서 살아가고 있다.

보통 우리의 현실은 지식이나 분별작용이
자기 주관으로 뭉쳐 있어 지극히 협소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인간의 일면, 즉 이성이 아니면 욕망이라는
한 단면을 가지고
인생 문제라든가 세계관을 다룬다.

그러나 선은
인간을 일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면서
이성적, 감성적으로 작용하는 전 인간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관적인 분별이 끊어진 경지가
선의 구경(究竟)이냐”
고 묻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의식분별이 끊어진 심층에서 작용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역시
우리가 가진 현행의식(現行意識)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그대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통 학문이나 사상은
이러한 현행의식이나 아뢰야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철학적으로
체계가 이루어진 진리라고 할지라도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지면 그 체계가 깨지고 만다.

그래서 늘 새로운 학문이나
철학체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근본 문제인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래의 참모습은
의식 과 무의식을 초월한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렇든 참선은
모든 분별적인 지성. 사고. 무의식마저
철저하게 탈각해 버린 참사람을 깨닫는 것이다.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이성과 반이성,
불질과 마음 등의 상대적인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모든 가치와 사유의 밑바탕에는
절대 이율배반의 법칙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이성적 입장에 있는 현대적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참사람은
본래부터 모든 이율배반적 한정(限定)을
초월한 사람을 일컫는다.

또한 마침내
새로 각(覺)했다는 것도 없이
본래의 참사람인 것이다.

이 참사람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시간과 공간에 한정(限定)됨이 없으며
본래부터
청정무염(淸淨無染)하여 자유자재하고
형상이 없으면서 일체현상을 창조한다.

선(禪)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진실한 자기, 참사람으로
돈연(頓然)히 전환하므로
무명번뇌(無明煩惱)를
일단(一斷) 일체단(一體斷)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과학적 지성과 생(生)의 충동까지도
보편적이고 자주적인 정위(定位)를 지시해서
적극적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역사를 실현한다.

임제 스님 같은 이는 경전을 탐구하다가
‘문자와 언어는 약방문(藥房文)에 불과하다’
는 것을 깨닫고 참선을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게
인생의 문제를 실지로 해결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참선은
맹목적으로 그저 따르라는
교조주의(敎條主義)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실지로 수행을 해서 깨달아야만 한다.

이 참선공부를 바르게 하려면
화두(話頭)를 간절히 참구(參究)해야 하는데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 생명체가 지적인 의식을 초월해야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단(疑團)에
자기의 전 존재가 통일되고 또 긴장이 되어서,
마치 백미터 달리기에서
‘탕’하는 신호를 시작으로 달리는 순간처럼
몸과 마음이 한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고
더욱 순일(純一)하게 정진(精進)하면
의식분별(意識分別)이 끊어진
은산철벽(銀山鐵壁)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화두가 분명하면서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면
의식의 기멸(起滅)은 없어져 버리게 된다.

선을 깊이 수행하면
그런 경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은 기멸이 없어진 상태지만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않고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화두와 의단이 일체가 되어
무의식(無意識)의 차원(次元)까지도
뚫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절대 이율배반이 해체되어
청정(淸淨)해서 일물(一物)도없되
‘산은 이 산이요, 물은 이 물인 경지’
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앉아 머물면
조사문(祖師門)을 투과한 것이 못 되고 만다.

여기를
돈연(頓然)히 투과(透過), 견성(見性)하여
비로소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참선이란
견성이나 자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면목 자체를
진실로 본래 그대로 깨닫는 것이다.

간절하고 진실한 발심으로
실지로 참선공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겐
참선은 참으로 어렵다.

참선의 본래면목은
깨달음을 위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주체이며
참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불성(佛性)에 대해
‘인간의 마음에
내재(內在)하지만 현실과 다르다’ 고 해서
내재적 초월이라고
신비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참사람(眞人)은
내재하는 것도,
보통의 현실에 외재(外在)하는 것도 아니다.

참사람은 바로
현금(現今)에 주체가 되어
절대현재(絶對現在)인 것이다.

이것을
‘영원의 현금(現今)’ 또는 ‘절대현재’라고 한다.

참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근원적인 주체가 되어
모든 피동적인 자기상실을 극복한
자유자재한 인간 본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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