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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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향기

호남불교의 요람 천년고찰 백암산 백양사

백양사의 주요 고승은 백양사 창건 후의 중창주를 들 수 있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이 창건하여 백암산 백양사라고 하였으며, 고려 명종 대 중연이 중창하면서 정토사라고 개칭하였고, 1350년(고려 충정왕 2) 각진국사 복구가 3창하였다. 그 후 1786년(정조 10) 환성이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 도암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만암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여환, 중연, 복구, 도암, 만암과 같이 백양사를 창건·중창한 인물들도 주요 고승으로 필히 간주되어야 하겠다.
안진호는 「白洋年과 白羊寺」 중 ‘「마」 白羊寺 歷代住持 芳銜記’에서 백양사의 역대 주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開山 如幻, 2세 혜오, 3세 지정, 4세 경조, 5세 지관, 6세 범우, 7세 의소, 8세 中延, 9세 혜선, 10세 性富, 11세 경전, 12세 동명, 13세 一麟, 14세 覺儼, 15세 淸叟, 16세 絶潤, 17세 幻庵, 18세 龜谷, 19세 언휴, 20세 혜선, 21세 碧松, 22세 敏訔, 23세 知白, 24세 震黙, 25세 喚羊, 26세 逍遙, 27세 白谷, 28세 무가, 29세 喚惺, 30세 蓮潭, 31세 거원, 32세 羊岳, 33세 華月, 34세 枕松, 35세 道巖, 36세 鏡潭, 37세 漢陽, 38세 청계, 39세 德松, 40세 華曇, 41세 보경, 42세 應雲, 43세 錦海, 44세 보봉, 45세 학산, 46세 서호, 47세 幻應, 48세 曼庵, 49세 錦海, 50세 曼庵(現 住持)

백양사의 법맥으로 지정된 승려들도 백양사의 주요 고승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창건주인 여환과 중창주 중연, 각진국사 각엄존자 복구, 그리고 조선시기 청허의 문도 소요와 조선후기 선종승, 특히 양악과 중창주 도암 등은 전근대 백양사의 주요 고승으로 더욱 추앙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에 간행된 「만암문집」 ‘(2) 백양사 법맥’에 의하면 ‘각진국사 복구스님 이후로 환성 지안스님에 이르기까지 백양사에서 뚜렷한 사자상승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백양사는 청허 휴정스님의 4대 법손인 환성 지안스님이 주석하면서 뚜렷한 사자상승을 이룬다.

환성스님은 청허스님의 3대 법손인 월담 설제스님에게서 법을 이어 받고, 직지사의 모운 진언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각지를 돌며 화업법을 열었던 분이다.

스님의 강맥은 호암 체정·설파 상언·백파 긍선스님을 거쳐 환옹 환진·월초 거연·운허 용하·영호 정호 스님에게로 이어져 근대의 대강맥을 이룬다.

환성스님의 법맥은 호암 체정스님을 거쳐 설파 상언스님과 연담 유일스님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두 스님의 법손들이 대대로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지금의 백양사 문중을 이루게 된다. 두드러졌던 스님들로는 백파 긍선·설두 유형·환응 탄영·만암 종헌 스님 등이 있다.

그러는 한편 백양사 측에서 우리나라 고승의 법맥 계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제57세 태고 보우 선사, 제58세 환암 혼수, 제59세 구곡 각운, 제60세 벽계 정심, 제61세 벽송 지엄, 제62세 부용 영관, 제63세 청허 휴정, 제64세 편양 언기, 제65세 풍담 의심, 제66세 월담 설제, 제 67세 환성 지안, 제68세 호암 체정, 제 69세 연담 유일, 제70세 양악 계선, 제71세 침송 성군, 제72세 덕운 천훈, 제73세 한양 용주, 제74세 취운 도진, 제75세 만암 종헌, 제76세 서옹 상순(제76세)

조선중기 불교계의 법맥은 중국의 임제종 고승에게 전수받은 태고 보우로부터 비롯된다는 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앞서 안진호가 전술한 내용을 따라야 할 것이다.
백양사 강원 강맥

그 외에 백양사에서 추념하여 봉안한 진영과 부도와 탑, 비의 주인공도 백양사의 주요 고승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양사 影閣에 모셔진 여환, 각진, 중연, 연담, 심송, 해운, 덕운, 경허, 경담, 화운, 응운, 취운, 보경, 금해, 인담, 성담, 혜은, 천경, 호암, 양악, 인암, 문곡, 도암, 한양, 덕송, 청계, 봉성, 학산, 만암 종헌, 봉하 장조, 묵담 스님과 승탑원에 모셔진 만암, 소요, 묵담, 지백, 경월, 서산, 모운, 무가, 서운, 봉하, 석산, 추강, 해담이다.

마지막으로 백양사의 주요 고승으로 간과해서는 안될 인물은 현대 한국불교계를 이끌었던 다음과 같은 고승들이다.

즉,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교정 만암,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한국불교태고종 초대종정 묵담, 총화종 초대종정 추강 등으로 종단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백양사 출신으로 종정을 지낸 승려들도 백양사의 주요 고승으로 주목되어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조선중기 백양사의 사세를 확장한 고승들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허 휴정의 문도 逍遙 太能(1562-1649), 진묵 일옥 그리고 정관 일선과 기허 영규 등은 백양사에 주석하거나 관련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요는 백양사에서 출가하였고 필적과 승탑이 있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백양사로 改額한 것은 1574년(선조 7) 喚羊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편양 언기의 적전으로 휴정의 4세 법손인 煥醒 志安(1664-1729)은 백양사 운문암을 중창하여 종풍을 떨치었다.

환성 지안(1664-1729)의 문손인 설파 상언(1707-1797)과 蓮潭 有一(1720-1799)이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하였으며, 그들의 문손들이 주지를 하면서 백양사는 더욱 도량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 더욱 확증된 바와 같이 백양사 강맥을 이은 주류 계보는 환성 지안의 문손이자 호남의 교학 종장이었던 蓮潭 有一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들이었다. 환성의 법맥은 호암 체정을 거쳐 설파 상언과 蓮潭 有一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두 고승의 법손들이 대대로 백양사에 주석하며 현재의 백양사 문중을 이루었다. 이들 문중에서 두드러진 고승은 白坡 亘璇·雪竇 有炯·幻應 坦泳·만암 종헌 등이라고 하겠다. 앞서 강조하였지만 환응은 일제강점기 30본산의 宗匠으로 추대된 대강백이었으며 율사이었던 만암은 백양사의 사격을 오늘에 이르게 한 고승이다.

그연담 유일은 대둔사를 주요 수행의 근거지로 하였는데, 物外庵에서 10일간 佛供을 드리는 등 백양사에 머물렀다.

즉, 백양사의 강학은 蓮潭 有一(1720-1799)이 활동하였던 18세기 후반부터 활성화되어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단초를 연 승려가 연담 유일의 제자 羊岳 啓璇(1757-1837)이다.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雪坡와 雲潭스님에게 내전과 외전을 배웠다. 학문의 바다가 넓어지고 교학의 눈이 맑아지자 문장의 가풍을 크게 떨치고 덕이 많기가 남들보다 뛰어나 백암이 다시 온 것인지 覺眞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스님은 학문이 이미 이루어지고 도가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르자 연담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연담스님의 저서 중에 「備忘記」 권이 있다. 그런데 그 책을 손수 2본을 써서 한 본은 강설하는 자리에 놓아두고 다른 한 본은 양악스님에게 주어 보게 하였는데 영남지방에서 온 학인이 강력하게 간청하여 가져가 버렸다.

羊岳 啓璇은 백양사에서 출가하였고 유일의 사형이자 화엄학의 대가인 설파 상언과 대둔사 강사로 명성을 떨쳤던 雲潭 鼎日에게 경전을 교습하였다.

그는 백양사 淸流庵에 오랜 기간 주석하였지만, 연담이 주관한 해남 표충사의 守護 및 도총섭을 맡기도 하였고 ‘8도 승풍규정 선교양종 화엄강주’로 칭해졌다.

계선의 강맥은 침송 성순을 거쳐 백양사 물외암에 주석하였던 虛舟 德眞(德雲)에게 이어졌는데, 漢陽 龍珠華曇 法憐의 두 계열로 나뉘어 이어졌다.

즉 한양 용주의 강맥은 翠雲 道珍을 거쳐 曼庵 宗憲으로 전해졌고 화담 법린은 금해 관영에게 강석을 넘겨 근대 백양사 강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 白坡 亘璇(1767­1852)은 나이 26세인 1792년(정조 16)에 강사로서 운문암에서 100명의 학인을 가르쳤다.

백파의 선사상은 운문암 선풍으로 이어져, 법손으로 설두 유형, 경담 서관이 있으며, 경담의 뒤를 환응 탄영이 이었는데, 그 선풍을 일으키는데는 환응의 공이 컸다. 그리고 석전 한영, 학명 개종, 만암 종헌, 용성 진종 등의 고승들도 운문암에서 수행하였다.

백파 긍선의 법과 사상은 문손 雪竇 奉琪(有炯, 1824-1889)에게 이어졌는데 백양산 正觀 快逸에게 이어졌다.

鏡潭 瑞寬(1824-1904)도 어려서 장성 白羊寺로 출가하였으며, 龜巖寺의 白波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應雲 性能도 백양사에서 주목해야 할 승려이다.
스님의 법명은 性能이고 호는 應雲이며, 長城 白羊山 淨土寺 강원의 학인이다.
漢陽 龍珠스님의 처소에 입실하여 법통을 이으니, 羊岳의 4대 법손이고 德雲의 손자 법제자이며 寶鏡과는 동문 법형제가 된다.……정토사에 돌아와 지혜의 향을 피우고 강당에 앉아서 경전을 가지고 의문가는 부분을 묻기 위해 오고가는 학인들을 맞아 강론을 펼쳤다. 사방에 걸림이 없고 바람을 관찰하는 무리들도 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구름이 모여들 듯 밀려들었다.……錦海스님은 선방을 새로 열어 참선과 교학을 함께 운행하였고, 應雲스님은 雲門庵을 중흥시켜 강론과 독송을 아울러 정립하였다.
신선은 羊을 타고 오르내리고 산은 허공을 능멸하며 푸르렀다 희였다 한다. 覺眞國師는 뒤에서 먼지를 밟으면서 강림하였고 白坡율사는 앞서간 발꿈치를 이어서 찬양하였다. 백양산에 구름 걷히매 하늘 가 산봉우리 高壽를 드리고 한강 물 거울처럼 열리매 파도 밑 魚龍이 驪珠를 바친다.

백양사의 주요고승으로 1864년 백양사를 5창한 道庵 印正(1805-1883)을 들 수 있다.

도암은 1817년(순조 17) 13세에 백암산 淨土寺의 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순조 27) 印月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하루 한 끼만 먹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켰으며, 1840년(헌종 6) 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때부터 정토사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을 엄중히 지키도록 했으며, 가람을 중창하여 백양사라고 하였다. 그 후 白鶴峯 아래 석실에서 10여 년간 정진하였다. 다시 天眞庵으로 옮겨 수년 동안 머무르다가 1883년(고종 20)에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후술하는 桂煥 등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강학 전통 외에도 백양사에는 우리나라 율맥의 정통이 계승되었는다는 사실도 매우 강조되어야 한다.

조선 후기에 大隱律師(1780-1841)는 스승 錦潭 장로와 함께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안거하다가 우리나라의 계맥이 모호함을 탄식하고 慈藏 眞表의 聖別受戒를 흠모하여 7일기도 끝에 瑞相受戒로 우리나라 계맥을 새로이 정립하였다. 즉, 우리나라 율맥은 大隱· 錦潭·草衣·梵海·霽山에게 이어져 마침내 龍城에게 傳戒 되었다. 또 범해에서 제6대 虎隱, 제7대 錦海 瓘英(1856-1926), 제8대 曼庵 宗憲(1876-1956), 제9대 黙潭 聲祐(1896-1981)로 이어지고 있다. 제7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 고승들이 율맥을 전승하여 백양사는 율맥의 본산인 것이다.

그리고 불복장 작법의 계보도 연담 유일(1720-1799) → 화담 법린(1843-1902) → 錦海 瓘英(1856-1937) → 묵담 성우(1896-1981) → 도월 수진(1948-)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양사 고승들이 전통적인 불복장 작법을 계승시켰다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의식 간소화라는 측면을 고려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의 불복장 전승은 백양사 고승들이 주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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