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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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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20 07:18 조회1,7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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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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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9.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과학문명에는 생명관이 부재하고
더욱이 욕망철학이 그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현댄 사회는
풍부한 물질과 고도의 안락을
추구하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는 황폐해져서
인간성의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점과
특히 최근 그 양상이 날로 험악해지고 있는
청소년 범죄는
비단 당사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연대적, 구조적인 공감으로 치유해야 할
이 시대의 환부(患部)라 하겠다.

오늘날 인류에게
다가온 위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핵무기의 살상적인 위협과
대기오염에 의한 생물계의 질서 파괴 및
기상이변, 자연재해 등
많은 위기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위기는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다.

물론, 워낙 많은 인구가 살다보니
인간 스스로가 생명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현재 세계 인구 과밀국에서는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를 막으려고
인구 억제정책을 쓰고 있는 반면,
선진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아기 낳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인구 증가율이 마이너스인 나라에서는
출산을 하면 그 비용을
전부 국가에서 부담할 뿐만 아니라
많은 혜택을 준다하니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어쨌든 세계는 지금
인구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는 한정되어 있으며
인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다.

도시는 더욱 비대해질 것이며
시골에는 더욱 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그로인한 도시인구밀도의 증가는
서로 자신만이 잘 살겠다는 욕망을 가중시켜
나 이외의 사람은
무시하고 미워하고 적대시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의 양상이다.

시골에서는 위, 아랫마을의 소식까지
서로 훤히 나누고 살고 있는데 반해
요즘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실제로 어떤 조사기관에서
조사한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한정된 면적에
알맞은 사람들이 살 때는
서로 정답게 살 수 있지만
그 숫자가 점차 불어날수록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미 도시는 사람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다반사다.

한마디로 한심하다.

사자도 자기 동족들끼리는
서로 죽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바로 앞에서 토끼가 얼씬거려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미 지각과 이성을 갖춘
만물의 영장임을 망각한 지가 오래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동물 분류학상
현재의 인류를 지칭하는 학술용어이다.

철학적으로는 지성,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이며
지성인(知性人), 예지인(叡智人)을 뜻하기도 한다.

아득히 먼 시절 지구상에
처음 인류가 출현한 후 오랜 세월을 진화하여
비로소 인간은
오늘날의 문명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 만큼 장구한 생명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더욱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을 조명하는 각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비교 설명을 통해
어떠한 생명관이
보다 완전하고 근원적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로,
분자 생물학에서 보는 생명관이 있는데
인간 생명체의 본질은 단백질과결합,
세포핵 내 염색체의 중요한 성분을 이루는
DNA의 이중나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형질을 전하는 DNA가
유전자의 본체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이라는
분자생물학의 생명관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학문적이고 피상적이며
기계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생명은
얼마나 복잡하고 구체적이며
한량없는 조건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둘째로,
대뇌 생리학에서 말하는 생명관이 있다.

생리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사람뇌의 가장 심층에 있는 뇌간척수계는
수억 년 전에 형성된 것임이 밝혀졌는데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도마뱀,
악어 같은 파충류의 뇌구조가 이와 같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사람의 호흡을 조절하고 몸을 움직이며
자세를 바로 잡는 것 등을 관장하는
장률신경을 운용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물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의 조절은
뇌간척수계에서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 뇌간척수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바로 대뇌변연계이다.

대뇌변연계는
포유류의 뇌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부터 수천만 년 전에 생성된 것이라고 한다.

사자, 호랑이 등
포유동물의 씩씩한 힘은
여기에서 비롯되어 작용한다고 한다.

대뇌변연계는
다시 대뇌피질이둘러싸고 있다.
이 대뇌피질은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바로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 창조하는
인간 고유의 정신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대뇌피질은
이미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대뇌피질 안에는
포유류의 대뇌변연계와
파충류의 뇌간척수계가 모두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등돌물에서
오늘날의 문명인으로 진화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참선에 들 때에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가부좌를 하여 몸의 자세를 바로잡고
숨을 고르게 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는
파충류가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와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숨을 고르게 한 다음에는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참구하는데
이것은 대뇌피질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참선은
대노피질의 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파충류, 포유류가 가진 의식의 경지를 초월하고
무의식을 돌파하여
형상이 없는 순수한 우주 근본생명체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든지
‘나[我]’라는 의식이 있다.

‘자기’라는 정신작용이
쉼 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자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전부를 부정하여도
생각하는 놈 자체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의심할 수 없는 구경(究竟)의 자리,
즉 의심하는 자기의식을 깊이 연구하여
근대철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올포트는
“사람은 2~3세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의식이 생기는데
인격의 형성은 이때에 이루어지므로
환경이나 부모에게서 받은 교육,
가족이 주는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1백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뇌의 용량은 500cc로
원숭이의 뇌 용량과 비슷하다.
그 후 약 60~70만 년 전부터
30만 년에 걸쳐,
호모 에렉투스라는 화석인류가 생존했으며
불을 사용하고 이때부터 석기와 토기를 만들었다.

또한 현재 생존하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호모 에렉투스 화석은
중국,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호모 에렉투스의 뇌용량은
900~1200cc라고 하며
인류의 가장 비슷한 화석인류인
독일 네안데르탈의 석회동(石灰洞)에서발견한
19만 년전의 네안데르탈인의 뇌용량은
현대인과 거의 같은 1400cc로
이 원시인류는 석기와 골각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시신(屍身)을 매장하는 관습이 생겼다.

비로소 자기의식이 깨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라는 의식이 없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자
비로소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시신에 대한 두려움도 일어나
매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일부 그릇된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죽였다는 생각조차 못하니
10만 년 전의 화석인류보다도
생명에 대한 자각이
덜 발달한 부류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올바른 사람이라면
‘자기’라는 깨달음을 넘어서서
‘자아의식’마저도 분명한 것이 아님을
확연히 타파하여
한층 차원 높은 생각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의식마저 초월해서
참다운 인간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바른 철학이며 바른 종교요,
또한 향상된 생명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자기의식을 깨닫는 심층에는
무의식적 잠재의식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획기적인 저서 [꿈의 해석] 에서
‘꿈은 잠재의식의 발산’이라고 했다.

또 융은
여러 사람의 잠재의식의 공통된 바탕 위에서
형성된 공통된 무의식이
‘집합적 무의식’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무의식의 자기야말로 자기의 근본’
이라고 주장한 학파도 있었다.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는
의식 있는 보통 인간을 초월한
실존철학을 주장하기도 했다.

서양 심리학은
근대에 들어와서야 이 같은 것을 주장했지만
불교는 이미 2천 년 전에
유식철학이 발달하여 잠재의식을 설명했다.

물론, 불교의 잠재의식이
서양심리학과 내용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의 정신분석학과도
상통하는 점이 많을뿐더러
훨씬 차원 높은 경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우주근본 실상을
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유식철학의 아뢰야식은 ‘찰나, 찰’에 변한다.
즉, 폭포수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과 같이
우리 의식작용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밖으로 작용하고 작용한 그것이
다시 안으로
훈습(薰習:불법을 들어 마음을 닦아 나감)되어
무의식이 되고
그 무의식은 다시 밖으로 작용하여
현행의식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업의식(業意識)에 불과하지만
더 깊이 참구하면
불성(佛性)자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불성을 깊이 참구하여
부처를 찾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중생들의 불성 회복을 가르쳤다.

이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선(禪)이야말로
인간 근본생명체를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해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선법문(禪法門)을 들어 보이겠다.





 어떤 스님이
향림(香林)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향림 스님이 말하되,

“오래 앉아서 피곤하구나.”


설두(雪竇)스님이 송(頌)하기를

한 개 두 개 천만 개가
조롱(鳥籠)속을 벗어나
무거운 짐을 훌쩍 벗어났도다.

왼쪽으로 휘젓고
오른쪽으로 휘저어 뒤에 따라오니
자호(紫胡) 스님이 유철마(劉鐵磨)를 치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를 하면,

도잠(陶潛)은
팽택(彭澤)에서 오직 버들만을 기르며
번악(潘嶽)은 하양(河陽)에서 꽃만 심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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