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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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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28 07:40 조회1,6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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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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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5.

쌀값은 얼마인가?


곡식과 과일을
추수하는 수확의 계절이 무르익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의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운 가을이다.

또한 공부하는 사람도
한층 삼매에 드는 가절(佳節)이다.

오늘날은 공업화시대를 맞이해서
우리 인류가
역사적으로 큰 격변기에 직면해 있다.

격변기의 혼란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가면
인류가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부르짖고 있는 이때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선법(禪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참다운 인간의 실상인 선법을 바탕으로
공업화에 오염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하여야
인류가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스포츠나 예술 방면에서
잠재해 있던 힘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법을 바탕으로 한 세계사 창조야말로
우리 민족의 참다운 사명임을 자각하고,
우리 민족이
그를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인류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원래 선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근원이지만,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에서 선법이 형성될 때
우리나라 스님들도
그때 비로소 조사선(祖師禪)을 형성했다.

또한 우리나라 스님들이
범어(梵語)로 된 인도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전부 오랑캐라 여기는 등
야만적인 민족이었는데,
생각도 못한 철학.인생관. 세계관을 보게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불교의 생명은
그러한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는 생동하는 생명체에 있다.

부처님께서 생명체를 해결하여
그것을 글로 적은 것이 경전이 된 것이지,
근본은
우리가 날마다 살고 생각하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에는
항상 껍데기인 형식과
근본생명인 알맹이가 있으며,
그 알맹이는 우리 생명체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통을 배울 때에
근본적인 생명을 중시해야한다.

그러하지 않고
형식과 인습에만 끄달리면
그것은 생명이 있는 전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거쳐 이어 내려온
선조들의 진리라 할 수 있는데,
현실에만 치우쳐
이러한 전통을 무시한다면
현실의 문제를 결코 잘 해결할 수 없다.

어느 나라든지 훌륭한 전통을 기초로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켜야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또한 복잡한 현실을 도외시하고
산중에서, 혹은 별유천지에서
전통만 지켜 나간다면
전통과 현실은 격리되기 쉽다.

즉 전통과 현실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을 때
훌륭한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제자들은
“부처님을 의지해서 공부했는데
부처님이 가시면 어떻게 하느냐”
고 비탄에 빠져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하라.”

이는
참다운 자기를 의지해서 공부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에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자기를 꾸짖고 꾸짖어서 꾸짖을 것이 없이
‘옳다, 이제야 됐다’ 그러한 경지에 갔을 때
비로소 ‘나인 자기’와 ‘자기를
깨달은 지(知)’가 하나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존재가 자기이고
자기가 존재인 지(知)가 될 때
그 자리의 자신을 알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소피스트, 즉 지식 있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알음알이를 자랑하고
또 자신들의 사상
“모든 안다는 지식이 참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지만
근본적으로 비판해 들어가면 모순에 빠져서
‘그 지식이 참으로 무지한 것’
이라는 근본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 자리가 바로 ‘참나’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저 자신을 알라’는 말은
불교적으로 보면
순수한 의식의 차원에서 자기를 알라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면
무의식과 의식,
생(生)과 사(死)가 서로 대립되어
절대모순에 빠질지도 모른다.

이렇듯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순수한 의식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법은 그 순수한 의식을 돌파하고,
무의식까지 초월해서
절대의 경지에도 걸리지 아니한 것이다.

그토록 자유자재한 것이
선(禪), 불법,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것이 분명한 것이냐,
어떠한 것이 진실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서 참으로 초월한 그 자리를 규명해야
참다운 철학이요 종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생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초월하여
다시 현실적으로 살아 나와서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일거일동의
그 자리가 바로 선(禪)인 까닭이다.

[임제록] 에 보면 이러한 말이 있다.

산승의 견처를 요약하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이제도 없다.

깨달으면
바로 깨달아서 시간을 보내지 아니한다.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으며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어서,
일체 시간 중에
다시 특별한 법이 없으니
설사 한 법이 이보다 지나는 것이 있다 해도
나는 꿈과 같고 환과 같다.

자신의 참모습은
현실의 인간도 초월하고
종교의 절대적인 경지도 초월해서
현실에서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한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스님이
청원(靑原) 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청원스님이 이르시되,

“여릉(廬陵) 쌀값은 얼마인가?”


천동각(天童覺) 스님이 송(頌)하기를

태평성대의 업적은 상이 없고
시골 노인의 가풍은 지극히 순박하네.

다만 농촌 사람 모여서
노래 부르고 술 마시니
순(舜)임금

요(堯)임금의 공덕 알 것 없구나.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혼자 앉고 혼자 행하니 참 악한이요
규칙도 법규도 없으니 늙은 납자라.

사방팔면에서 구속하기 어려우니
천하에서 누가 너를 어찌 하리요.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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