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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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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06 07:59 조회1,5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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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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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6.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자리


지난 5월,
불교인의 가장 큰 축제인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여러 불자님들은 뜻 깊은 날을 보냈다.

성인(聖人) 가운데 성인이시며
광명(光明) 가운데 광명이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만유(萬有)에 충만(充滿)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지만
무명중생(無明衆生)의 교화를 위해
사바의 이 땅에 화현(化現)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다시 중앙에 돌아와 서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땅 아래 나만이 홀로 높다”
고 하는 사자후(獅子吼)를 하셨다.

이때 ‘나’의 뜻은
인간의 근원, 참모습,
우주 근본생명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현실의 의식,
즉 알음알이로 살고 있는데
그 의식의 밑바탕에는 무의식,
즉 잠재의식이 작용한다.

이러한 잘못된 업(業)으로 뭉친
자기 주관의 의식과 무의식을 타파해서
시간과 공간, 나고 죽음을 초월한
인간의 참다운 생명체의 그 자리를 ‘나’라고 한다.

그 자리는 전 인류,
우주 전체가 한 생명체가 되는 나(我)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근본생명체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자리이며 참이며 진리이다.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지만
한정된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정신을 배제한
인간의 발전은 생각할 수 없고
설사 발전을 한다고 해도
지말적(枝末的)인 발전에 불과하다.

어찌 뿌리가 없는 마루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과학문명은 나무의 잎과 꽃, 가지에 불과하다.
땅속에 깊이 심어져 있는 뿌리가
나무의 근본생명체이듯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야말로
모든 삶의 근본생명체인 것이다.

그 진리는 만고에 불변하며 참 진리이므로
또한 영원한 것이다.

견실하게 뿌리 내린 나무는
땅 위에서도 곧고 당당하게 자라듯이
사람이 학문을 연마할 때에도
기초가 튼튼하면
별 무리 없이 체계적으로
수학(修學)할 수 있는 것이 그 이치이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건대
현대 과학문명은 외형적인 발전만 거듭하다 보니
모래위에 지은 누각처럼 근본을 상실하고
이제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할 만큼
허약한 치부가 드러나
자체의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로 인한 파멸의 위기가
우리 곁에 다가와 위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썩은 환부를 도려내듯
과학문명의 치부와 병폐를
과감히 제거해 재창조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깨달은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근본진리를
이 세상에 다시 살려서
과학문명의 밑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우리 조상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속활자와
신라시대 천문곽측소였던 첨성대를 발명했다.

우리 민족은 뛰어난 창조적인 발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오늘날의 문화와 문명으로
다시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오래 전에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한’
과학을 단편적으로 실현했지만
그것을 과거에서 현재로
활발하게 계승하지 못하고
동면(冬眠)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와 반대로 서양에서는
급격한 문명화운동이 일어나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발전을 급속히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문화적인 잠재력이
충분한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을 두고 다른 방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은
동양의 정신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논리에는 한계가 있지만,
동양의 합리성은 합리적인 것을
초월한 비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지극히 타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견고하게
우리 역사를 움직여 왔기 때문에
합리적인 새로운 문명의 필요성이 절박하지 않았다.

동양과 달리 서양의 14세기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흑사병이 유행하여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하였고
종교적인 지위를 차지하려는
교회권력의 암투가 거듭되었다.

더욱이 당시 종교가
자체의 비합리와 모순으로
여러 사람의 정신세계를 만
족시켜 주지 못하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
형식과 인습에서 벗어나
성경의 순수한 원리로 돌아가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교단이 분열되는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로는
내면의 정화(淨化)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발전을 지향하는 인간의 에너지는
이제 외면 세계의 개발로 그 방향을 바꾸어
분명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자학의 시계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과학문명에 집중된 힘은
점차 배가되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고
새로운 안정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과학문명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점차 길이, 시간, 무게,
질량, 거리 등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물질문명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을
너무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물질적인 부를 만들어내는 기술에
인간이 종속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기계문명, 과학문명을 외면하고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은
인간의 복지실현에 부합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인간 스스로
인간의 영성(靈性)적인 존엄을 지키지 못하고
과학에 영합한다면
오히려 과학은
본래의 참다운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환각제에 중독된 사람이
자신의 중독상태를 모르거나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부정하는 것과 같이
과학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계문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 곁에는 일하는 로봇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이 해야 될 일을
빠른 시간에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국면으로 진일보하고 있는 과학은
합리주의. 공리주의. 실증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여러 사람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실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성격을 과학은 갖고 있다.

또한 이성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과학인 것이다.

이는 인간이 외면과 객관성 등을
중시하는 특성을 가진 까닭이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의 내면세계가 추구하는
‘인간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
따위의 정신적인 면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어
새로운 병폐를 심각하게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과학시대에 나타난 현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쇄기계의 발명이다.

인쇄기계는 예전에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던
수동적인 작업을 개선시켜
과학문명을 대량으로 문자화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이로써 일부 특별한 계층에게만 허용되어
지배계급을 형성시키는 기반이 되었던 책이
대중에게 보급 되어
모든 사람들이 쉽게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간의
괴리를 타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1세기에 들어와
학령 아동에게 초등보통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세워져
일반국민 모두가 공부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열리게 됨으로써
이 역시 특권계급의 타파에 기여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교육은 점차 대중화되어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제도가 세워져
폭넓은 교육인구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획일적인 교육을 받게 되자
마치 기계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동일한 규격품으로 다량 생산되듯이
개인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는
폐단을 낳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의 교육제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점은
얼른 생각하면 교육에 한정된 현상 같지만
기계문명이 이룬 엄청난 업적과
함께 나타난 반작용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폐단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과학문명의 기술에만 주력하면서
정작 발전의 핵(核)이 될
인간의 내면세계를 소홀히 한데서
파생된 문제점이기도 하다.

멜빌의 소설 [백경(白鯨)]에 등장하는
선장 에이하브는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내 수단은 옳았지만
동기와 목적은 잘못되었다”고 했다.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 수단은 옳지만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목적을 세우고 가치를 정립하는 정신은
잘못되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근본이
욕망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그러한 발상 위에서 세우는 동기나 목적은
어떤 것이든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문명은
인간 생활에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요즘에 와서는 그 병폐를 지적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교육. 사회.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성 개발을 장려하는 부분은 매우 적다.

과학문명이 태동한 이래
외면(外面) 세계에만 치중해 왔으나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서
인간의 내면(內面) 세계를 개발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그 운동은
인간의 근본원리, 근본바탕, 근본생명체를
완전히 해결한
불법과 선(禪)으로 하여야 할 것이며
선이야말로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을 비판하고 초월하며
모든 종교, 불교마저 초월할 것이다.

그래서 선의 그 자리를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말하는 이 자리는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활발발(活潑潑)한 자리인 것이다.

일체를 초월한 자리에 있으면서
또한 나의 근본생명체에 살아 있는 그 자리를
참으로 순수하게 살려서
모든 대중이 동참하여 참선하고
일상생활에서 불법을 참구하여
내면세계를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나아가면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자재한 선법문을 하나 하겠다.



 장사(長沙) 스님이 하루는
산에 놀러 갔다가 돌아와서 문 앞에 이르니
수좌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장사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산에서 놀다 온다”

수좌가 묻되

“어디까지 갔다 오십니까?”

스님이 말하되,

“처음에는
고운 풀을 따라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느니라”

수좌가 말하되,

“아주 봄이 한창입니다”

스님이 말하되,

“가을 이슬이
연꽃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으리라”


설두(雪竇) 스님이 송(頌)하기를

대지에 티끌 없으니
누가 눈을 뜨지 않으랴?

처음에
고운 풀을 따라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 돌아온다.

여윈 학은 찬 고목에서 깃들이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울부짖는다.

장사 스님의 무한한 뜻이여

돌!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평소 일없이 옷 입고 밥 먹도다.

푸른 하늘을 평지같이 활보하니
별은 날고 번개는 번쩍이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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