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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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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09 10:15 조회1,6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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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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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29.

들오리는 어디로 날아갔는가


근대인간(近代人間)은
비판적이고 객관 타당한 것이 아니면
용인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선(禪)의 객관적인 타당성을 밝혀서,
선이야말로
영원히 존재가치가 있는
참다운 종교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적인 인간은
인간의 이성을 자각한 존재이다.

이 이성적인 입장은
반이성적인 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
늘 있게 되는 것이지,
반이성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해서
이성적인 것만 있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상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과의 대립은
이성의 근본구조이며
이성과 반이성일 대립해서
이율배반(二律背反)되는 것을
상대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반이성을 항상 수반(隨伴)하므로
반이성적인 것을
궁진무여(窮盡無餘)하게 제거해 버린
순수한 이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을 참이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적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상대적 이율배반이
절대적으로 전체적 이율배반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절대적 이율배반이라고 말한다.

이 절대적 이율배반은
관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자기화 되어 버린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이성적인 입장에 있는
근세적(近世的)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절대적 이율배반에
인간의 절대부정(絶對否定)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인생 문제를 다룰 때에
인간의 생사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생(生)과 사(死)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사적 생명은
생(生)하여 사(死)를 극복할 수는 있으나
사는 없는 순수한 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의 밑바탕에는
생사라는 이율배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사의 상대적 이율배반을
근원적으로 따져 본다면
생이라고 하는 것은
사를 수반하는 생이므로
순수한 생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생사적 생명은
절대적으로 사의 생명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은
생사라는 절대적 이율배반을
밑바탕으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생사를 확장하면
물질의 생멸(生滅)과 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존재와 비존재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 때문이니
이것을 여의고 해탈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과
이성. 반이성의 절대적 이율배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체(一體)이다.

이성의 절대적 이율배반과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은
구체적으로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통사람의 본래적인 참모습 인 것이다.

보통사람은
의식인 현행(現行)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에서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이 되어 도달한 경지는
순수의식(純粹意識:분별이 없는 의식)의 경지이며
선정진중(禪精進中)의 한 단계이다.

이 순수의식의 경지에서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되어 나아가면
무의식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이 깨어있을 때의 무의식과
무몽무상(無夢無想)한
숙면(熟眠)때의 무의식이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되어서,
무여(無餘)하게 포괄적이고 전체적이고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궁극. 근원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종문(宗門)에서 말하는
오매일여 (寤寐一如)가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이 궁극. 근원적인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이 해체되면
청정(淸淨)하여 일물(一物)도 없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경지로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좌재(坐在)하면
형극림(荊棘林)을 투과(透過)한 것이 못 된다.

여기를 지나
돈연투과(頓然透過) 견성(見性)하여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깨달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형극림을 투과해서 견성한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주체성이 되는
본래면목이 자각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면목이 자각한다고 하면
한정된 시간을 뜻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자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면목 자체가
엄연히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래면목은 인간 본래의 진실상이다.
이것은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나 누구에게든지 타당하며
따라서 선문(禪門)에서는
이 본래면목을 본분(本分)이라고 하기도 한다.

각(覺)하는 기연(機緣)은
실로 여러 가지로 잡다하다 하겠다.

그 무한한 기연은
결국은 절대적 이율배반에 불과한 것이다.

주체적 절대 이유배반에까지 가서
그것을 투과(透過)하고, 본래로 불생불멸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본래로 청정무염(淸淨無染)하여 자유자재하며,
형상이 없으면서
일체 형상을 창조하는 진실한 자기로
돈연히 전환하므로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명번뇌(無明煩惱)가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 되는 것이고
일처투 일체처투(一處透 一切處透)하게 되는 것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이를 말한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방법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식(六識)과 칠식(七識)도 아니고,
무의식의 제8아뢰야식(阿賴耶識)도 아니고,
종교에서 말하는 신(信)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선(禪)에서 말하는 각(覺)이다.
깨달아 진실하게 된 ‘자기’는
깨닫기 이전의 ‘자기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깨닫기 이전의 ‘자기의 작용’은
바로 깨달은 ‘진실한 자기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覺)한 자기 현실에서
궁극적으로 부활하는 데에
진정한 종교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이성적인 자기가 주체가 되었던 나가
마침내
진정한 종교를 깨달아서 진실한 나가 된 것이다.

이 각(覺)한 현실은
미(迷)한 현실과
시간. 공간적으로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공간의 근원에서 성립되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깨달은 자기, 즉 근원적인 주체는
이성과 감성의 근원이 되며,
이성과 감성은 깨달은 자기의 작용이 된다.

이 근원적인 주체는 이성을 초월해서
자유로이 이성으로 살고 생사를 초월해서
자유로이 생사하는 영원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역사를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창조하는 입장이다.

소위 천국이나 극락세계는
현실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므로
결국 도피염세(逃避厭世)하는 것이 되어서
현실을 구제한다고 할 수 없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대 과학문명을 비판하고
이 과학문명과 선(禪)과의 관계를
투찰(透察)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다시 투찰하면
미래의 세계 역사를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의심이 쉽게 풀리게 된다.

선에서는 일체를 융합하는
보편(普遍)의 ‘일(一)’과 ‘다(多)’
혹은 특수(特殊)가 불이일체(不二一體)인
존재원리를 가지고 있다.

‘다(多)가 없는 일(一)’은 내용이 없는
공허에 빠지게 되고,
‘일(一)이 없는 다(多)’는
통일이 없는 분열에 빠지게 되는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과학문명은
다화(多化) 혹은 특수화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문명은
‘보편(普遍)의 일(一)’을 상실하게 되어
분열병에 걸리고 있는 것이다.

‘다(多)’를 상실한 도그마적 신앙으로 된
‘일(一)’을 믿었던 중세기는
일다불이일체(一多不二一體)의 존재원리를
파괴하게 되어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근대문명은
‘일(一)’을 상실한 ‘다(多)’만으로 치닫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 분열병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상영원(無相永遠)의
자기가 자각한 선(禪)은
일다불이일체(一多不二一體)가 된다.

이 원리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한다면
세계 역사는 분열하지 않고
화합.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그 주체적인 문제를 증명해 보겠다.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 생활은 편리해지고
물질도 풍부해지는 반면에
사회생활은 복잡하게 된다.

오늘 날만 보아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예전에 비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거기에 끄달려 자기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분열병이나 노이로제 등
정신병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인의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인
‘본래면목’은
어떠한 복잡한 것에도 끄달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주체성은 본래 평등하고,
모든 사람은 본래 일체이기 때문이다.

자비는 이러한 근원적인 주체성이 갖추어진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행해지게 되는 것이며,
이 근원적인 주체성은
본래 형상이 없어 자유자재한 만큼
그 자비행도 어디에나
걸림 없이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神)만이
절대애(絶對愛)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이 절대애가 뒷받침된
인인애(隣人愛)를 행할 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이 본래 불(佛)이므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절대애,
즉 자비를 행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현대 사람들은
역사를 대립에서 대립으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즉 현재는 늘 대립상태에 있으며,
이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말이다.

이것을 변증법적 역사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서는 결코 평화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은 그 근원적인 주체성에서 보면
모두 평등하고 일체이며
항상 자비행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비화합의 현재라고 할 수 있는데
역사는 바로 이 자비화 합의 바탕에서
대립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비화합의 바탕에서
대립을 해결해 나가는 역사라야
세계 평화를 진정으로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원적인 주체성에서 볼 때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인종이든지
절대 평등하고 일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류 차원에서
오늘의 세계 현상을 비판해 보기로 하겠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자연과학은
일체의 존재하는 것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생각하므로
모든 과학의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 또는 정신 과학이
과학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물질에 관한 학문인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처럼 과학은
물질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과학에는 생명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생명관이 없는 과학문명은
대 자연을 파괴 및 오염시켜서
많은 생물이 살 수 없게 되었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간까지도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주체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 모든 생물, 모든 대 자연이
영원한 생명체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모든 생물을 존중하고
대 자연을 아끼는 지혜와 자비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한다면
지구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청정불국토로 건설될 것이다.

물론 과학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그리고 편리하게
생활하도록 공헌한 바는 매우 크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문명만으로는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파멸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문명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인
‘본래면목’으로 과학문명을 뒷받침해서
다시 역사를 창조할 때에
인류는 진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인간상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이 실지로 깨닫기를 기다려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이
이러한 것인 만큼
진실한 인간상에 순응해서 행동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본래면목은 의식은 물론이요
무의식까지도 투과하고,
거기에도 머무르지 않고
독탈무의(獨脫無依)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문자나 언어로 횡설수설하고
체계논리를 번론난도(繁論亂道)하는 것은
본분과는 천리만리
어긋나 버린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종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대종사라고 할 수 있는
마조 대종사의 본분에서
제철직지(提掇直指)한 법문을 들어서
불조의 낙처(落處)를 밝혀 보겠다.


 마조 큰스님이
백장 스님과 함께 길을 갈 때에
들오리 한 무리가 날아갔다.

마조스님이 이것을 보고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백장 스님임 말하되

“들오리입니다”

마조 큰스님이 다시 묻기를

“어디로 날아갔는가?”

백장 스님이 말하되

“이미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 큰스님이
백장 스님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 스님이 아파 소리를 지르니
마조 큰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디로 날아갔는가?”

마조 대종사는
백장 스님을 깨우치기 위해서
바람이 없는데 물결을 일으키고
고운 살결에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으로
백장 스님에게 법문하신 것이다.

깨치면
세간사(世間事)가 바로 본분사(本分事)이고
깨치지 못하면
모두 세간사가 되어버려서
자유자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마조 대종사가
백장 스님의 코를 비틀지 아니했으면
백장 스님은 깨치지 못했을 것이다.

마조 큰스님과 백장 스님의 문답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견문각지(見聞覺知)같지만
소소영령한데에 주(住)하지 않는다.

백장 스님이 깨달음에 머물렀다면
확철대오(廓徹大悟)하지 못했을 텐데,
백장 스님은 재참인연(再參因緣)에서
마조 큰 스님의 할(喝)을 듣고
확철대오했던 것이다.

다름에 그 재참인연을 들어보겠다.

백장 스님이
두 번째로 마조 큰스님을 뵈니
마조 큰스님이 불자를 세웠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말하되,

“이것이 용(用)입니까,
용(用)을 여읜 것입니까?”

마조 큰스님이
다시 불자를 제자리에 거니
백장 스님이 잠깐 잠잠히 있었다.

마조 큰스님이 말하되,

“네 입을 열어 말하여
어떻게 사람을 가르침 것인가?”

백장 스님이 곧 불자를 세우니
마조 큰스님이 말하되,

“이것이 용(用)인가,
용(用)을 여읜 것인가?”

백장 스님이 역시
불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걸었다.

그러자 마조 큰스님이 문득
“할” 하니
백장 스님은 삼 일 동안 귀가 먹었다.

마조 대종사의 일할(一喝)에
백장 스님이 삼 일 동안 귀가 먹었다.

그래서 마조 대종사의 정안(正眼)을
백장 스님이 전수하게 된 것이다.

백장 스님은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
마조문하의
3대 정안종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대종사는
미천죄과(彌天罪過)를 면할 수 없었다.

왜 그러할까?


아래에 내가 착어(着語)를 해 보이겠다.

두 큰스님이
이렇게 법거량하시니
돈을 잃고 처벌당함이네.

어찌하여 그러한가?

참금이 빛을 잃고
기왓장 조각돌이 방광(放光)하는 구나.

금소가
용광로(鎔鑛爐)에 녹으니
자취를 볼 수가 없네.

아주 작은 물고기는 우주를 삼키고
지극히 작은 벌레는 수미산을 토해내누나.

각별히 말하노니
한 쑥대 화살이 억병을 요동시키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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