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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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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10 17:46 조회1,5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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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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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30.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일다일여(一多一如)


우선 현대의 과학문명과
임제선(臨濟禪)과의 문제를
간단히 말해 보겠다.

서양의
중세기는 신에게 절대 복종하고
신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이룩한 시기이다.
그러다 1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성을 각성하여
인간이 중심이 되는
과학문명을 점차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물질을 기초로 하는 과학은
본래 자기 입장을 향하여
반성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세계와 인간으로부터
초월하는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그결과 과학문명은
인간과 세계의 존재 기반이 되는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바탕이 없다.

이와 같이
근원적인 ‘바탕’을 상실한 현대인은
인간관계,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기본구조는
‘다(多)’를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일(一)’과
근원적. 통일적 ‘일(一)에서
형성되는 ’다(多)가 융화되어야 한다.

‘다(多)’없는 ‘일(一)’은
내용이 없는 단순한 허공이고,
‘일(一)’이 없는 ‘다(多)’는
통일이 없는 단순한 분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복잡화하고 정글화해서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일(一)을 상실 했으니
큰 병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분열. 혼란. 허탈. 불안. 혼미. 회의.
노이로제. 염세(厭世)등 소위 문명병은
근원적. 통일적 일(一)을
상실한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근본의 일(一)은
더욱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현대인은
근본의 일(一)을 상실했으므로
분열과 혼미, 불안에 빠져서
원시적인 종교나
점술 따위에 의지하는 수가 많다.

하지만 이 원시적인 종교나 점술은
임시의 진통제도 못 되고
오히려 분열과 불안을 가중시키므로
매우 위험하다.

복잡한 정글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욕망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인 만큼
욕망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망은
초월적. 근원적인 차원의
전체 연관 속에서
체계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원적인 바탕이 없는 욕망은
진실하고 객관적(客觀的)이며
타당성(妥當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욕망이 가득 찬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주체성을 잃게 된다.

욕망에 끌려서 사는 사람은
주체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욕망의 지배에 끌려서 사는 삶은
자유도 없고 책임도 없으며
아무 가치도 없는 삶이다.

욕망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종속물로 삼기 쉽다.

그러므로 이허란 사람들은
서로 상극이 되고, 서로 해치게 되고,
결국은 다 같이 파멸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폭력도 욕망에서 나오고,
세상을 혼란케 하는 권모술수도
욕망을 쪼차서
지성을 악용함으로써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욕망만을 쪼차 줄달음질을 친다면
타락과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동양은 예로부터
전체주의적 국가조직을 유지해 왔다.

전체주의는
개인에 대하여 절대복종을 요구한다.

아무리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성군의 덕치(德治)라 해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선형의 정치체제 아래서는
진충보국주의(盡忠報國主義)는
성행할지 모르나
자주. 자율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개인의 창의도 개발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과학적인 사고와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禮)를 숭상해 왔는데
이것은 인격과 도덕적 면에서
자타가 동등한 지위에서
서로 존경할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다.

주종의 예라든가 군신의 예라는 것은
힘의 관계이지
진정한 예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굴종(屈從)의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위력관계 아래에서는
인격적인 자주성이 있을 수 없으며
예(禮)의 윤리적
대등격성(對等格性)을 찾아볼 수 없다.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길을
봉쇄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동양에서는
가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는데
이것은 미풍(美風) 이라 하겠다.

그러나 가족을
무조건 존중한 나머지 한도를 넘으면
봉건주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주종관계로 가정의 질서를 형성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위에서 아래로 은혜를 베풀고
아랫사람은 복종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애가(愛家)의 심리상태에서는
책임감, 깊은 사색력, 풍부한 창의,
세계성을 띠는 행동 기풍이 발생할 수가 없다.

가족만을 중히 여기는 인습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자주 정신이 충분히 개발되지 못하여
자주적으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대단히 약해진다.

그리고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게 마련이며
개인이 집단이나 조직의 독립단위라는
의식이 없다든가
혹은 이러한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면
집단의 행복이나 발전을 위하여
공헌하겠다는 의욕이 우러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 모두
차별 없는 참사람의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고 개성을 살려서 자주적으로 생활하며
서로 도와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가정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타자적(他者的) 신(神)에 의속(依屬)하거나
절대 복종하기를 거부하므로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며,
낙천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성적으로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신념 과 희망을 가지고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이성적으로 개발하고
이성적으로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성만으로
구경적(究竟的)인 해결이 되는 것일까?

이성적 입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성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비판해 보자.

그러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생사문제를 다뤄 보기로 하자.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생은 사가 없는 생이라야
오직 참다운 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은 반드시 죽음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생사적인 생명인 것이다.

이 생명 자체는
이율배반으로 성립한 것이며
생사적 생명은 죽음이 없는 순수한 삶이 아니므로
생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자체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생사적 생명을 절대 부정하지 않으며 안 된다.

따라서 삶에 대한 죽음은
상대적 이율배반이며
생사적 생명은 생명 자체가
이율배반이므로 절대적 이율배반이라 하겠다.


다음은 가치론적으로 말해 보겠다.

근대의 인간은 이성적인 생활을 한다.
이성적 가치생활은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
두 가지가 대립하는 것이다.
즉 반이성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성적인 것이
반이성적인 것을 다 극복해 버려서
반이성적인 것이 아주 없어진,
순수한 이성만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반이성적인 것이 없는
순수한 이성만으로 된 생활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이성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반이성적인 것과 대립한다.
따라서 이성적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성적 생활의 입장에서는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의 근본구조는
절대적 이율배반이다.

감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성의 세계도
주관과 객관의 이자대립(二者對立)에서
작위 하는 것이므로
실재 자체가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조작이다.

결국 이성의 세계는
주관적인 입장을 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인 생사적 자기나
가치론적인 가치, 반가치적 자기는
둘이 아니라 합쳐져서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쉽게 설명을 하자니까 둘로 나누어서 했을 뿐이다.

이제 이 절대 이율배반적 자기를
극복하는 문제를 말하기로 하자.

절대 이율배반적 자기가
절대적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이율배반의 바탕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참나(眞我)가 자각하는 것이
선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다.

즉 절대적 이율배반은
참나가 자각하는 계기는 되지만
그 계기가 극복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성. 이성. 생사적 자기의 심갱(深坑)에 있는
절대적 이율배반을 초월한
참나가 자기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감성. 이성. 생사적인 것을 극복한다.

그런데 그 경우에 있어서
깨달은 ‘참나’는 절대적 이율배반의 밖에,
다시 말하면 절대적 이율배반에 대해서
격절적(隔絶的), 타자적(他者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이율배반 안에서
그것을 탈피하여 자각(自覺)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나’는
절대적 이율배반을 탈피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 진실재(眞實在)인 참나,
진실재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한다.
곧 임제 스님이 말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이 참사람은 본래로 각(覺)한 참사람이다.
새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참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참사람은
생사도 없고,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고,
지우(智愚). 선악(善惡). 미추(美醜).
중생과 부처의 차별도 없고,
계급. 민족. 인종. 국가
심지어 생물과 우주, 시간과 공간의 차별도 없다.

모든 한정을 절(絶)해서 독탈무의(獨脫無依)하여
일체 계박(繫縛)을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하다.

이러한 참사람이야말로
더욱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또 더욱 분화 발전하는 역사의 현실에서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현실도피와 신불(神佛)에 의지해서
자기상실에 빠지지 않고,
절대자주와 절대자율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참사람은
모든 일에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발하는
근원적인 주체의 사람이다.

그래서 참사람은
과학적 지성과 생의 충동까지도
타당한 체계적(體系的) 정위(定位)를 지시해서

대용전창(大用全彰)을 실현한다.

이 참사람은
다시 세계를 형성하고 역사를 창조하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다.


다음에 사랑에 대하여 말해 보기로 한다.

먼저
기독교의 절대적 사랑은 신(神)만이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절대적 사랑이 뒷받침된
상대적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인인애(隣人愛)라고 부른다.
이 인인애는
창조자인 신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피조물인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절대애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절대애, 즉 자비의 주체는
참사람의 모습이고 바로 현실의 모습이다.

모든 행동은 자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자비를
위에서 아래로 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이 평등도
흔히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주장하지만
보통사람 안으로 초월한
참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는 평등이라야
구경(究竟)의 평등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평등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횡적 넓이의 평등이며
사람 자체의 종적 깊이의 평등이다.

인간의 근본바탕은 허공과 같이 한정할 수가 없다.

무연대비(無緣大悲)는
보통의사랑, 즉 애견(愛見)의 자비가 아니라
자성지혜(自性智慧)를 바탕으로 하는
절대 평등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의 선(禪)은
개인을 구제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좁아져서
개인이나 집단, 국가가 세계성을 띠므로
세계의 위기를 타개하지 않으면
개인도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선도
세계를 구제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개체도
그것을 성립시키는 전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개체를 말할 때 전체는 본래 그 속에 있고,
전체라고 할 때 개체는 본래 그 속에 잇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에서 출발해서 ‘다(多)’를 이루는데
자연히 ‘다(多)’를 절대로 하는
다원적인 사회관, 국가관이라 하겠다.

반대로 전체주의는
사회 전체를 절대로 한다.

이때의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다원적 성원월 초월한 전체적인 ‘일(一)’이다.

이 전체적 ‘일(一)’을
절대로 하는 데에서 전체주의가 성립한다.

민주주의의 단점은
다(多)의 방종과 무질서라 하겠고,
전체주의의 단점은
개인의 자주. 자유. 창의를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선은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 多卽一)이어서
일다일여(一多一如)의 입장이다.

일(一)이 즉 다(多)이므로 전체주의를 지양하고,
다(多)가 즉 일(一)이므로 민주주의를 지양해서
고차원의 새로운 체제가 구현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는
중세적인 신율성(神律性)과
타율성(他律性)을 비판하고,
현대 문명을 창조하고 있는
근대 인간주의의 절대모순을 해결하고 초월하여
차별 없는 참사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참사람의 입장에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가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세계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
참사람의 자비대원(慈悲大願)인 사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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