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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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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22 07:24 조회1,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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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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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0.

쓴 외는 뿌리까지 쓰고
단 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참으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청명한 계절이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얼마 전에는 노사분규가 일어나
근로자와 경영주가 서로 대립하는 일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기도 했다.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서로 존중하고 봉사하는 입장에서
원만한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면 되리라고 생각된다.

사회의 갈등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사회의 갈등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언젠가
인간의 훌륭한 내면세계의 생명체를 개발하여
감성과 이성을 초월한
영성(靈性)의 깊은 경지에서
현실을 반영할 때에
참예술이 창조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다.

예술은
인간의 생활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영위해 나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은
과학문명이 어느 정도 발달하여
정상 궤도에 오르고
그 혜택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의를 누리고 있다.

과학문명이 태동할 때에는
보다 향상되고자 하는
인간의 발전지향심리가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과학문명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무시한 채
물질적으로만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성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물질주의로 인해
문화도 외면적인 것으로
저급한 일면을 보이고 있으나
진정 인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참다운 예술세계는 인간의 근본생명체,
그 자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예술은 여러 주의(主義)가 있는데
창조방식에 따라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주의(寫實主義)는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대상을 있는 모습 그대로 충실히 묘사한 것이다.

인간의 외면 세계를
여러 각도로 분석한 다음
외(外)적으로 사실을 규명하는
과학 문명주의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주의(印象主義)는
인간의 내적 생명이 감득(感得)한
외물의 신비에 주안해서
마음에 새긴 것을 주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상징주의(象徵主義)는
외적 경험과는 별도로
내면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추상주의(抽象主義)는
삼라만상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을
무시하고 초월해서 새롭게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과 대상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무상(無相)의 경지에서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얼른 생각하면 비슷해 보이지만,
대상물의 주관이나 객관을 완전히 초월하고
아무런 형상이 없는 경지에서
자유자재하게 창조하는
동양예술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표현주의(表現主義)는
작가 개인의 강한 주관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종교예술을 살펴보자.

종교예술은 동. 서양에서 다 존재한다.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
즉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불교의 부처님은 인간과 단절되어 있다.

보통 종교예술은
신불(信佛)을 향한
의속적인 현실에서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밖으로 우러나서
초월적인 숭고함을 감득하는 것이며,
그 바탕에서 종교예술이 창조된다.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추상주의. 표현주의. 종교예술과도
다른 차원의 예술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선(禪)예술이다.

선예술에서 표현하는 자기는
무상(無相)의 자기이고,
이 무상의 자기가
무상인 유상(有相)의 사물을 통해서
무상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선예술을 표현주의라고 부른다.

가령, 보통의 불화(佛畵)는
색(色)과 형(形)이 있는 불상을
유상의 심상(心象)을 통해서 묘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선예술은
무상의 자기가
자유자재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외재(外在)한 불(佛)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예술은
인간의 진실한 무상(無相)의 주체가
바로 작용해서 창조, 형성되므로
표현주의라고 하기보다는
바로 실천한다는 뜻에서 즉현주의(卽現主義)
또는 바로 창조한다는 뜻에서
즉조주의(卽造主義)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서도(書道)는 쓰는 사람이
붓과 종이 등을 초월한 경지에서 글을 쓸 때에
휘호(揮毫)가 극치에 도달한다.

글씨를 쓴다는 것은
자기 본래면목이 작용해서
예술적인 창조를 하는 것이다.

만일 글씨를 오직 읽기 위해 쓴다든가
전통 서법(書法)에 고정된
형(型) 또는 법칙에 맞도록 쓴다면
이러한 서(書)는
자신의 자기상(自己象)이 아니라
결국 글 쓰는 자신이 아닌
외면에 있는 형상에 불과하므로
회화에서 말하는
사실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서(書)는
외계물(外界物)과는 달라서
비형상적(非形象的)이기 때문에
종종 추상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書)는
일체 기존의 형상에 제약받지 아니하고
모든 형상을 벗어 버린
서가(書家)의 근본생명이
자재하게 약동하고 활약하여
사실잔재(寫實殘滓)가 전혀 없이
자기상(自己象)이 표현된 것이니,
이러한 서(書)는
추상 중의 추상이며 순수 추상예술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선서(禪書)를
‘표현’이라고 하기보다는
바로 실현하는 ‘즉현(卽現)’,
바로 창조하는 ‘즉조(卽造)’
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선서는
문자형(文字形)으로 쓰는 데에 주력하거나
사실적 형(形)으로 쓰거나
상상적 형(形)으로 쓴다든가 하지 아니하고,
그 형(形)을 추상하여
자기의 무상의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생명이 약동해서
형(形)에 구애됨 없이 형성한 글씨형(形)이다.

그래서 표현주의.
즉현주의. 즉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서화(禪書畵)는
일체를 초월해서
확연무일물(廓然無一物)하면서
안으로 무진장이어서 유현(幽玄)하며,
조작이 없어 자연스럽고 고담(枯淡)하며,
정적무동(靜寂無動)하지만
웅경(雄勁)해서 고위초준(孤危峭峻)하고
형(形)에 구애됨이 없는 무법(無法)의 법이다.

또한 독탈무의(獨脫無依)해서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웅혼분방(雄渾奔放)해서
원전자재(圓轉自在)하여
신비한 작용까지도 초월해서
어디에나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창조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깊은 경지의 선(禪)이 무엇인지
선법문을 들어 보이겠다.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 스님께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면 어떻게 피합니까?”

동산 스님이 이르되,


“어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느냐?”

스님이 말하되,


“어디가 춥고 더움이 없는 곳입니까?”

동산 스님이 이르되,


“추울 때에는 그대를 춥게 해버리고
더울 때에는 그대를 덥게 해버린다”


설두(雪竇) 스님이 송(頌)하기를

손을 드리우면 도리어 만 길 벼랑과 같다
바름과 치우침으로
어찌 적절히 배치할 수 있으리오.

밝은 달이 유리 궁전을 비추니
영리한 한씨(韓氏)의 개가
한갓 계단을 오르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쓴 외는 뿌리까지 쓰고
단 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나무말[木馬]은
저녁 비낀 햇빛을 등지고
풀 속으로 들어가서 자취가 없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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