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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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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24 10:02 조회1,5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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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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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2.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수렵을 생업으로 삼았던
선사시대의 원시인으로 시작되는
인류문명의 역사는
씨족사회, 부족사회를 발전시켜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인류문명의 역사가 변화, 발전하는
문화 활동의 밑바탕에는 종교가 있다.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선시시대 인류의 조상들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자연의 재해를 막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 자연계의 현상에
불가사의한 영(靈)적인 힘,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의 대상으로서 숭배했는데
이것이 원시종교의 시작이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의 정령(精靈)을 인정하는 신앙이었다.

그 후 씨앗을 뿌려
곡식을 지배하는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농사는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였고,
또 생산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상호 물물교환이 발생하게 되었고,
필요에 따라
상업이 성행하여 시장이 형성되었다.

씨족사회, 부족사회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되고 힘이 커진 집단은
점차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국가에는 개인의 힘을 초월한
절대 권력이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의 대표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원시종교 때 가졌던
애 니 미 즘 적 외경(畏敬)의 대상도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의 사고(思考)와 인지(人智)가 발달하면서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의 절대적인 능력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막연히
외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대 자연 현상을 초월하고,
개인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권력도 초월하고,
인간의 근본자리마저 초월한 그 자리를
숭배하게 됨에 따라
종교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생한 종교 중에는
대 자연을 초월하고
인간 자체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의 근본이 되는 절대자이자 창조주
즉,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힘을 가진
인격적 신인 하느님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그러나 불교는
맹목적으로 모든 현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악 덩어리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의미와는 다르다)
거짓 덩어리이니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비판해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이 인식하는 대 자연도 초월하고,
인도의 범신론(汎神論)도 초월한다.

이렇듯 한정된 인식을 타파하고
더 깊은 경지로 몰입하다 보니
결국 ‘불교는 무아(無我)’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체를 초월하고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절대경지까지도 초월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모든 법이 연기(緣起)인즉
인간 개체와 우주만법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한 개체가 독립될 수 없으니
불교는 무아(無我)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일리가 있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초탈한 경지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무시하고,
연기의 차원에만 집착하여
불법을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로는
종교를 초월하고
종교에서 인정하는 절대적인 것까지 초월하는
높은 경지의 그 자리에서 자유자재한 것을
무아(無我)라고 설파하셨다.

불교의 근본교의(敎義)를 세 가지로 표시한
삼법인(三法印)을 보면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물(物). 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거늘,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하여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제법무아(諸法無我)로
만유(萬有)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가 없거늘,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이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생사의 윤회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의식과 무의식을 초탈한
열반적정의 진상을 말한다.

이상의 삼법인으로
부처님의 말씀과
그밖에 사상과 종교를 판정[印]하는 것인
즉, 이러한 경지는
구경(究竟)의 절대 경지를 초월하고
어디든지 의지하지 아니하여
독탈무의(獨脫無依)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차원에서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에 의존해 오던 시대는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인류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과학문명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 변화의 빠른 물결은
최근 컴퓨터 산업의 급성장으로
정보화시대를 이루었다.

이러한 외적인 변화에 따라
종교를 보는 관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절대적으로 군림해 온 서양의 종교가
서양에서 일어난 과학문명에 의해
배척되는 모순을 빚게 된 것이다.

과학은 어떤 가정 위에서
특수한 현상의 법칙이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원칙에 의한 운행(運行)을 이성적으로 개발한다.

쉬운 예로
서양의 종교는
과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왔던 서양의 종교가
모순투성이임이 드러나자
더이상 종교에
인류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학자들은 종교 대신
과학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의 과학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한 절대 불가사의하다는 하느님의 존엄을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과 인간성을 개발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신본주의(神本主義) 역사는
인간중심의 역사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역사의 주인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과학 일변도의 삶의 결과로
오늘날 많은 병폐를 낳았다는 것이 문제다.

과학의 발생 초기에는
인간중심의 삶을 영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출발한 과학문명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무시한 채
인간 외적인 물질에 집중하다 보니
형이하학에 치우친 인간의 욕망이 증대되었다.

욕망 실현에 급급하다 보니
타락이 만연하고,
인간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끼리
반목과 질시로 대응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제1, 2차 세계대전이 유발되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제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볼 때,

과학문명 그 자체는
인류에게 공헌한 바가 지대하지만,
인간성이 배제된 상태의 과학문명은
더 이상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는
‘과학문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각성을 해야 한다.

이런 때
인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인간의 참모습을 이룰 수 있는
종교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철학과 종교원리를 비판하여
초월하는 동시에 과학과 모순이 안 되는
차원 높은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대답은
불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는 온 우주가 한 진리이며,
부처님 몸과 하나다.
사람의 개체가 깨닫는 그 자리는
모두 똑같으며, 또 하나이므로 평등하고,
여기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함이 우러나와서
평화롭고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은
바로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뜻한다.

그런데 과학은
인간도 물질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연히 과학이 숭상되는 오늘날은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도 죄악을 모르며,
자신의 생명마저도
사소한 문제로 스스로 버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때의 어려운 일을 극복하지 못해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훌륭한 정신바탕을 심어 주지 못하고,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방조해 온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책임 때문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깨달은 법문을 말하겠다.


 어떤 스님이
수산성념(首山省念)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가 대답하기를,

“신부는 나귀를 타고
시어머니[阿家]는 끄느니라.”
하였다.


천동각(天童覺) 스님이 송(頌)하기를

신부가 나귀를 타고 시어머니가 끄니
몸매가 멋지고 자연스럽도다.

우습구나,
찡그림을 흉내 내는 이웃 아가씨
사람을 향해서
추함만 더하고 예쁘지 않도다.


또 송(頌)하기를

납자의 혀가 참으로 자유하다.
혼륜(渾崙) 속에는 송곳도 들어가지 않도다.

윤편(輪扁)이 수레 다듬는 솜씨를
아들에게 전해 주지 못하고
포정(庖丁)이 칼을 자유스럽게 쓰니
온전히 소가 없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를 하겠다.

쌍갈래 쪽머리 튼 여인이
눈썹을 예쁘게 그리고서
난경대(鸞鏡臺)앞에서 말이 수줍네.

자기의 고운 얼굴 비할 데 없다 하고
도리어 횃대로 가서 비단옷을 입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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