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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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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26 09:35 조회1,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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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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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4.

봄이 오면 꽃이 피거늘


먼 산의 나무들이
신록의 푸르름을 더하고
붉은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는
참으로 만물이 무성한 오월이 되었다.

이러한 대 자연의 무성함과 더불어
우리 인류 역사도
진정으로 위대한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시대와 인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활성화된 종교다.

오늘날의 종교는
현대 문명, 즉 과학문명을 뒷받침해서
올바른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윤리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의 다른 종교에 비해
현대의 과학,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인류를 구제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

반면에 서양종교는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판 정립해 왔을 뿐만 아니라
현실 문제에도 참여해서
올바른 종교이념을 실현하려고 힘써 왔다.

이 시간에는
종교와 현대 과학문명에 대해 말하겠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오늘날은
종교가 부재(不在)한 시대이고
아주 무력해진 시대이다.
그 결과
인간 정신이 퇴폐해지고 인간성을 상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어
연쇄살인사건과 같은 흉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생명경시풍조는
대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
자연계의 질서를 깨뜨려
생물의 생존을 어렵게 하고 지구를 황폐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 정신의 퇴폐는
인간을 희망 없이, 목적 없이
무의미하게 살게 하고
욕망 위주로 살아가게 하여
세상은 점점 험악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 문명은
퇴폐주의가 주조(主潮)를 이루는
세기말적 증상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종교가
어째서 그와 같이 무력해져서
세상이 험악해지고
인류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겠다.

먼저 현대 과학문명이
종교를 배척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겠다.

서양종교에서는
절대자인 신(神)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 바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어
신의 세계에 속하지만
동물은 자연계에 속한다고 해서
사람과 동물을 확실히 구분해 놓았다.

그런데 과학에서는
동물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한 생명체이며
동물이 진화를 거쳐 사람이 되었다고 하므로
서양종교와는 절대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우주를 한 생명체로 보고
자기가 지은 대로 그 결과를 받기 때문에
동물도 잘 진화하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과법칙으로 설명하므로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 서양종교는
한량없는 우주 가운데 사람이 사는 곳은
오직 지구뿐이라고 하는데 반해
과학에서는
이 무한한 우주에 수천억 개의 별들이 있고
그 가운데 사람과 같은 고등동물이 사는 별이
수백만 개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서양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척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한량없는 이 우주에는 끝없는 세계가 있고
그 가운데에는 사람 이상으로
고등한 생물이 살고 있다고 보아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오늘날 인류가 종교 없이 산다면
도덕적인 퇴폐는 물론이거니와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험악해져
종국에는 인류 파멸의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문명과 모순되지 않으며
과학문명을 뒷받침해서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라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문명의 공적은
의학의 발달로 인한 질병 퇴치,
통신의 발달로 인한 신속한정보,
빠른 교통수단, 대량생산 등
모든 방면에 고루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데
문제는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원리이다.

서양 과학문명을 뒷받침해 준 철학으로
데카르트 철학이 있다.

데카르트 철학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주장하는데,
사유하는 정신은 목적이 있지만
인식의 대상인 물질은
아무 목적 가치가 없고 기계적인 것이므로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은 이성철학이지만
동시에 지배한다는 욕망이 깔려 있는
욕망철학이기도 하다.

또 그가 주장하는 철학은
사유하는 정신, 이성 자체는
늘 변함없이 이성 그대로이며
이성은 생겨나고 죽는 것이 아니니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육체도 단순한 물질이어서
이러한 인간관은 생명관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죄악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생 문제를
전체적으로 혹은 근원적으로 완전히 해결했다.
즉 인간에게는 감각이 있고
감각을 지배하는 이성이 있고
이성을 초월한 영성이 있다고 그 구조를 밝히고,
우주에 대해서도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 근본생명체에서
다시 현실이 나와
전 우주를 형성한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불법의 인간관과 우주관에서는
전체가 한 생명체로서 평등하며 유일체라고 본다.

이 근본생명체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이어서
근원적인 주체성을 띤다고 하겠다.

이러한 훌륭한 생명관에서
저절로 자비심이 나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대 자연과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서
조화 있게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법이야말로
과학을 잘 뒷받침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과학을 초월하여
과학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근원적인 주체성을 확립시킴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대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과학시대인 오늘날
불교가 살아있는 종교가 되려면
현대 과학문명을 비판하여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해야 하므로
과학에 대해 말하겠다.

영국의 물리학자 버널(Bernal)은
과학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제 1단계는
1890년에서 1900년까지 10년간은
과학자나 발명가와 같은 개인이
연구, 발명해서 과학을 발전시킨
사적(私的)과학시대라 했다.

제 2단계는
제 1차 세계대전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이다.
이때는
대학의 연구시설이나 회사 연구소 등
단체에서 연구 발전시킨 산업계 과학시대다.

제 3단계는
국가 차원에서 과학을 발전시키는 시대다.

오늘날은
국가와 전쟁과 과학이
아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식의 과학발전은
언젠가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를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바람직한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과학을 발전시켜야 할까?

지금까지 인류는 개인. 집단. 국가 등
저마다의 이기주의로 과학문명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창조하는 오류 속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휴머니즘시대인 오늘날은
인간의 이성 자체가 생사를 면할 수 없고
늘 ‘참’을 추구하지만
‘거짓’을 수반하는 절대모순에 빠져 있다.

하지만
완전한 이성을 갖춘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이성은
거짓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참과 거짓, 생과 사, 선과 악이
상의상존(相依相存)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생 문제를 깊이 비판할 때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절대 모순과 절망, 불안에서 나온 것이
오늘날의 실존철학이다.

불법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서
인간의 근본생명체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어떤 것이 진실하고 명확한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파고들어가
생사가 없고 자유자재한 인간 근본생명체,
그 종교세계에 들어가는 행(行)이며, 실천인 것이다.

불법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생명체이고
인류가 절대평등한 자리이다.

그 평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한 생명체이고 평등이며
거기서 자비심이 우러나온다.

이와 같이
종교가 과학문명을 뒷받침해 주어야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가
전 인류, 전 우주 차원에서
자비와 화합으로 세계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때에 불법이야말로
과학문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종교인 것이다.

인간의 참모습 자리는
학문도 논리도 초월한 자리이므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문을 들어 말하겠다.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

운문 스님이 이르되,

“꽃나무 울타리이니라”

스님이 말하되,

“바로 그러할 때에는 어떠합니까?”

운문 스님이 대답하되,

“황금털 사자니라”


설두(雪竇) 스님이 송(頌)하기를

꽃나무 울타리여!
제발 잘난 체 마라.

눈금은 저울대에 있고
받침대에 있지 않도다.

그렇다 해도 크게 옳지 않으니
황금털 사자를 그대들은 보라.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를 하겠다.

봄이 오면 꽃이 피거늘
붉은 얼굴은 어디에 있는가.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거울 속에 비치지 아니하니 가엾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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