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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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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28 08:53 조회1,6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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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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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6.

괭이도 들지 않았거늘 고단한가


절기상 한 해가 시작되는 입춘이다.
입춘은 곧 봄을 세운다는 뜻이니
활기찬 시작으로 한 해를 열어가기 바란다.

길가에 걸려 있는
‘청소년 풍기 순화기간’이라고 쓰여진
현수막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12월 말부터
한 달 동안이 그 기간으로 되어 있었다.
연말의 들뜬 기분과
겨울방학으로 해이해진 청소년들의
탈선과 비행을 단속하려는 것인가 보다.

한 가정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집안의 자손들이 어떠한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손들이 훌륭하면
현재 그 집안이 쇠락했다 하더라도
미래에 크게 번창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청소년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면
그 나라는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 예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도 내일의 동량(棟樑)이 될
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잘 인도해야 한다.

요즈음 매스컴에서
청소년 범죄를 자주 보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술집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목숨을 잃는 사건도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기가 싫은
10대의 중학교 동창생들이
무작정 상경하여 취업이 안 되지
흉기를 가지고
지나가는 행인의 금품을 탈취하는가 하면,
청소원 부부를 위협하여
돈을 빼앗았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것뿐인가!
대입. 고입 시험에 낙방한 것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순간의 쾌락을 얻거나 절망을 떨쳐 버리기 위해
본드를 흡입하고 환각제를 복용해서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무조건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이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청소년 문제가 점차 증대되고 있는데
이러한 저변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思想)과 주의(主義)가
만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릇 모든 문제가
단순한 하나의 동기만으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청소년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현대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취(取)해야 하는지 말하겠다.

인간의 마음작용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눌 때
과학문명은
이성으로 개발된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이 지닌 아주 작은 부분의 작용일 뿐이지
인간을 깊이 탐구하려면
감성과 이성만으로는 절대모순에 빠져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성찰해 온 어떠한 종교,
어떠한 철학으로도
인간의 근본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영성(靈性)의 경지,
생사해탈의 경지를
석가세존께서 체득(體得)하시고
그 길을 열어 보이신 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이며,
그것이 곧 우주만법의 실상을 밝힌 것이다.

감성과 이성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까지 초월해서
인간의 깊은 근본바탕을
완전히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인간을 초월하는
신(神)까지 초월한 것이 또한 불법이다.

이와 같이
초월된 경지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최근의 첨단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태를 입증함으로써
2,500여 년 전에 밝혀 놓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자기 근본자리를 투철하게 명시(明示)하고
일체를 현성(現成)하여 근본생명체를 해결한다.

그 자리에서는
모든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한 생명체이며
우주 전체가 한 자리인 것이다.

합일(合一)된 그 자리에서
우러나온 자비심으로
서로 존중하고 봉사하는 역사를
창조하자는 것이 불법이며,
부처님이며, 조사 스님이며, 보살이다.

우리 자신을 깨닫고
일체 중생을 자비심으로 제도하겠다는
원력으로 살 때에
비로소 훌륭한 생명체의
활기 있는 삶이 영위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데카르트 철학을 얘기해야겠다.

근대문명의 원리를 제공하고
근대철학을
창시했다고 할 수 있는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프랑스의 대철학자이며
수학자, 자연과학자로서
근대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수학자답게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이므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명석하게 판명된 진리를
출발점으로 하지 않으며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했다.

철학은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또 어떠한 것이 진실한 것이며, 명확한 것이냐?

이렇게 일체를 의심하여 깊이 몰입하다 보니
‘자꾸 의심하는 놈’
이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도달한다.

즉 최후의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궁극에 이르렀고
이것이 철학의 근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하는 그놈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판별하는 의식,
즉 자기의 이성인데
이성은 언제나 분명하고 명확하다.

그렇다면
분명한 이성이
인식하는 물질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 철학은
사유하는 정신과
그 정신이 인식하는 물질을
인정하는 이원론(二元論)이 된 것이고,
이러한 논지에서 신(神)의 존재를 증명했다.

즉, 의심하는 내가 불완전한 것을 자각하려면
완전한 자의 관념이 내 속에 있어야 할 것인데
불완전한 내게
완전한 자의 관념이 있을 리 없으므로
실제로 ‘완전한 존재자인 신(神)이 있다’
는 추리를 차용해
신을 중심으로 한
물심(物心)의 이원론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데카르트 철학을 비판한다.

물심의 이원론을 보자면
사유하는 정신,
즉 의식은 사유한다는 목적이 있으므로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지만
사유하는 정신이 인식하는 물질은
아무런 목적이 없으므로
의식(이성)의 대상으로 지배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어떤 것을 지배하고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은
욕망의 표출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 있다.
물질은 없어질 수 있지만
물질과 달리 정신은 없어질 수 없다고 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하면,
정신이 배제된 인간의 육체도 결국은 물질이다.

즉 물질은 생명이 없으므로 죽음이 없다.
육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정신 역시 죽음이 없으므로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생명관이 상실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관을 거부한 이 철학이
어떻게 우주 미물(微物)의 생명관을 인정하겠는가!

이원론에 의해 모든 동물의 생명은
‘이미 없는 것’의 차원을 떠나 그저 물질일 뿐이다.

이처럼 생명관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이나 인간의 근본 욕망만큼은 인정했으나
이러한 철학 위에서 창조된 역사는 어찌되겠는가.

르네상스 이후
이러한 바탕에서 과학이 일어났고
급기야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과학만능주의에 젖어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를
경시하는 미혹에 사로잡혀 있다.

기계에 의존하기 전의 농경시대에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으므로
자연히 대가족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연장자와 젊은이들이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아서
서로의 사고방식이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핵가족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연장자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할 만한 공간이 주어지지 않으며,
연장자들도
젊은이들의 고뇌를 이해해 줄
대화의 장에서 소외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 문명사회가 인간의 내면을 무시하고
외면의 세계만을 발달시킨 결과가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조부모님 등 웃어른을
성인(聖人)으로 여길 만큼 존경했었다.

오늘날의 청소년들같이
부모의 허물을 탓하여 존경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전통을 계승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현대의 과학만능주의는
고문화전통(古文化傳統)과
대종교(大倧敎) 진리를 함부로 버리고 있다.

이러한 심성의 청소년들이라면
인간의 감성, 이성을 초월한
인간의 본래 근본자리는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현대의 병은
정신이 퇴폐하여
자율신경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기는
신경성병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생리학적으로 볼 때도
이성의 작용을 발달시키면
그 부분을 관장하는
대뇌의 전두엽만 발달되고
인간의 근본생명체를 움직이는
대뇌의 중추는 상대적으로 작용이 미미하여
자율신경의 혼란을 가져온다.

세상의 종말적인 위기를 조장하는
현대의 병을 치유해야만 한다.

환부를 도려내야만 새살이 돋아나지 않겠는가.

그러한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일을 이끌어 갈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요즘 청소년들은
편리한 생활과 과잉보호의 결과로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곧 체념하고 만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인내가 없는 것이다.

작은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무조건 자살부터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스스로 자제하려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또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책임감을 느끼는데
사고능력, 직관(直觀),
굳센 의지가 결여된 청소년들은
이미 책임의식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러한 사람을
‘브로일러(Broiler)인간’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브로일러가 무엇인지 아는가?

‘브로일러’는
사람이 식용으로 사육하는
새나 닭 따위를 일컫는 말이다.

양계장에서는 닭에게
많은 먹이를 주어 살찌게 한다.
그러나 들판에서 뛰놀며
마음껏 활개를 치는 꿩과 비교해 보라.

양계장의 닭은 살은 쪘지만
야생 숲에 내놓으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 청소년들의 신체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건강하고 조숙하다.
그러나 정신은 나약하기 그지없다.

햇빛만 보아도, 바람만 불어도
곧 시들어 버리는 온실의 화초처럼
병약하게 자라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서
과잉보호의 울타리는 이제 거둬야 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삶의 밭을 일구고,
내일을 창조하는
활기찬 젊은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단련(鍛鍊)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거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氣象)을 닮게 하라.

인간의 생명체는 결코 나약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또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똑같은 조건을 주어 살아가게 하면
모두 같은 유형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행동주의(行動主義)가 그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조건으로 교육시켜서
특정한 인간형을 양성하는 행동주의가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생명체에는
한량없는 지혜, 한량없는 공덕,
한량없는 자비심과 능력이 있으며
과거로부터 익힌 업력(業力)이 있다.

아무리 똑같은 조건을 주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성품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능력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로 일관된 오늘 날의 교육사상은
미래의 측면에서 볼 때 문제가 된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교육이다.

획일적으로, 규칙적으로,
균일하게 만드는 행동주의
- 불교에서 말하는 악평등(惡平等)이다 -
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결코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학습한 것, 경험한 것 등
지극히 주관적인 범위 안에서 자기주장을 하게 된다.

과잉보호와
획일적인 교육으로 성장한 젊은이들은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이
결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좁은 소견에서 현실을 비판하며
불만을 품게 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얼마든지 개성을 발휘하여
한량없는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성불(成佛)까지,
우주까지 초월해서
자유자재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법을 믿고 참구하는 우리는
한량없는 우주 근본생명체에서
우러나는 자비심으로 서로 존중하고
참으로 자유자재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훌륭한 역사 창조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명이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순간순간마다 생명의 실상을 밝히는
화두(話頭)를 들고 매진할 때
비로소 우리의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법에서의
참다운 자유자재한 인간상은
어떻게 다루었나를 알아보겠다.



 임제(臨濟) 스님이
운력(運力 : 普請)에 나가서 땅의 풀을 메다가
황벽(黃檗)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괭이를 세우고 서 있자
황벽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고단하냐?”,

임제 스님이 말하기를

“괭이도 들지 않았거늘
고단하단 말이 무엇입니까?”

황벽 스님이 문득 몽둥이로 치자
임제 스님이 몽둥이를 꽉 붙들고
한 번 밀어 넘어뜨리니
황벽 스님이 유나(維那)를 불렀다.

“유나야, 나를 일으켜라.”

유나가 앞으로 가까이 와서
부축하면서 말하기를,

“화상은 어째서
이 미치광이의 무례한 짓을 용납하십니까?”

황벽 스님이 일어나자마자 유나를 때리니
임제 스님이 땅을 파면서 말하기를,

“제방에서는 화장(火葬)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그때그때 마다 생매장한다.”

하였다.


대홍은(大洪恩)이 송(頌)하기를

쓰러뜨리고 일으키는 것은
만고의 가풍과 법규요
화장과 생매장은 제방의 본보기로다.

그러나 바른 눈으로 보건대
일시에 매장해 버림을 면치 못하도다.


대위철(大潙喆)이 송(頌)하기를

황벽이 땅에 쓰러지니
유나가 일으켜 세우고
화장과 생매장이여.
맑은 바람이 그칠 줄 모르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황벽 스님이
풀에 들어가서 사람을 구하나
온몸에 흙탕물을 면치 못함이로다.

눈 밝은 스님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해서
머리를 들어
하늘에 치솟은 매를 봄이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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