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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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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3-30 08:20 조회1,6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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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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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48.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한 말은 호떡?


우주의 일체 생물이
새로운 삶을 구가하며 약동하는
화창한 봄날이 되었다.

4월은 생명을 밝히는 달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우리의 참생명을 밝히는
귀중한 계절이 되기를 기원 드린다.

마치 계절의 봄을 맞이하듯이
세계 역사는
이제 태평양 시대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오랜 전통과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은
현재 부분적인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부흥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10억 인구의 인적 자원과
광활한 대륙의 보고(寶庫)는
‘잠자는 사자’로 인식돼 온
중국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또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패망을 딛고 일어나
세계경제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짧은 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룩한 경제개발국으로,
또 7천 년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긍지 있는 민족으로
역시 태평양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인도의시성(詩聖) 타고르는
한국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는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등불의 하나였던 한국
동방의 밝은 빛이 되기 위해서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리라.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 민족은 사상. 철학. 종교적으로
동서고금의 모든 것을 비판하여
가장 진실하고 가장 올바르며
가장 명확한 진리를 밝혀서,
그 바탕에서
온 인류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역사를 창조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매번 법회에서
오늘날 인류가 얼마나 큰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에 대한 극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인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인류가
어떠한 정신, 어떠한 사상,
어떠한 원리바탕으로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서양문명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래로 헤겔까지
인간은 이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생각했다.

이성은
옳다. 그르다, 참이다. 거짓이다,
착하다. 악하다 등을 사리 있게 분별한다.

그런데 중세기까지는
모든 것을 신(神)을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도
신의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자인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므로
인간은 점차 신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신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에 대한 반발로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실추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자는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로부터 인간의 권리가 자각되어
신이부여한 이성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성을 가진 인간,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인간 스스로를 존중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부터 헤겔까지 근대 철학사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이성을 확신하고
이성철학의 역사를 창조했으며,
또 이성을 개발하여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사람마다의
냉철한 이성바탕에서 나온 총의(總意)를
정당하다고 믿고 정치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과연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원동력이
이성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거나
여인의 아미(蛾眉)처럼
빼어난 달의 자태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또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상한다.

이러한 것은 오직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감각작용이 있어서
인간을 움직인다는 철학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는
이성철학의 시대가 붕괴되고
모든 인식의 근원이
감각. 욕망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철학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10세기 말 포이어바흐는
이성철학을 비판하면서
감각, 즉 욕망철학을 주장하였다.

감각에 근원하여
모든 욕망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원동력은
감각, 즉 욕망이라고 본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뒤를 이어
마르크스, 니체가 인간의 욕망을 다루었고
이러한 풍토에서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인간의 성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먼저 마르크스는
의식주에 대한 욕망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망이라고 보았고,
니체는
인간의 심층에는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이러한 권력욕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보았다.

또 프로이트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 성욕이라 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구현했다면,
니체의 주장을 실현하려 했던 이는
히틀러라고 말할 수 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는
많은 생명을 살상하고 문화를 탄압하는 등
인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사람들이다.

이는 욕망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시는 어떠한 오점도
우리 후세에게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인간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그러자면
인간의 기본 원동력이라고 여겨 온 욕망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중세기에
신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었듯이 말이다.

19세기 말 이성을 부정하고
욕망을 생명이라고 보는 철학이
사상의 왕좌에 처음 등장한 이후
욕망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생명의 복권이라고 착각하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욕망에 끄달려서 정신없이 살고 있다.

욕망을 우위에 두는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서로 도우면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반목과 질시로 살고 있으니,
자연히 사회 분위기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니
인류의 앞날은 어찌 되겠는가.

오늘날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서양철학은
‘죽음을 생각지 않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의하면
계속되는 의식주의 생활로
종족이 번식해 나가므로
죽음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또 니체는
“시간은 영원히 회귀한다”며
죽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성욕충동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영원의 의지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존재들이다.

아무리 충족된 욕망이라도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상황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므로
욕망을‘절대의 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욕망적인 인간
또는 이성적인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등장한 것이 절망철학. 실존철학이다.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자시에게 다가올 죽음조차 신식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에끄달려 사는 것이 보통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꼭 한 번은 죽어야 하니
우리는 정신 차려서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고 했다.

참으로 깊은 철학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숙시할 뿐
인생 문제를 해결한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한계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야스퍼스철학이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참이다. 거짓이다, 악하다. 착하다 등
이 모든 이성적인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절대모순에 빠진 것을
깨달아서 초월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존을 확실히 깨닫게 하는 핵심인
절대의식이라는 것은
사람과 절대의 경지,
즉 신(神)과의 합일로써 이루어지는
신비철학의 무아도취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신비철학에서도
직관과 대상, 자기와 대상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궁극에는
지극히 미미한 의식이 남아 있어서
철저히 해결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자기와 대상을 잊어버리고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는 경지에 이르더라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하여
자유자재 하므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동양과 서양은
인종. 문화 등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다.

종교를 보자면,
서양종교는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보는
소극적인 원죄론(原罪論)을 따른다.

완전히 부정하면 대립할 것이 없어지는데
어디까지나
죄인인 인간과 절대자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자인 신(神)에게 절대 복종해야 된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인간은 ‘고통 덩어리다’, ‘허무하다’,
‘죄업 덩어리다’라고 해서
완전히 부정하니까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고 절대의 경지만 남게 된다.

이것마저 또 초월해서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된다.

야스퍼스철학은
철저히 초월하지는 못하고
집착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불법은 완전히 초월해서,
초월하는 것마저도 초월하여
집착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차원이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던 이성, 욕망은
완전히 초월하지 못한 경지이므로
생명관이 분명하지 않다.

동양의 종교를 대변하는 불법은
감각을 완전히 초월한 데서 감각적으로 살고
이성을 완전히 초월한 데서 이성적으로 산다.

감성과 이성이 제자리에 정립되어 작용하며
자유자재하게 사는 것이
불법의 원리이며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 근원적인 인간관과 우주관에서
모든 작용이 조화되어
올바른 구경(究竟)의
참다운 생명관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과 모든 생물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에서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으로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불법은 밝히고 있다.

1,600년의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을
민족혼 깊이 간직한 우리 민족이
인간의 참생명의 바탕에서
태평양 시대의 주역이 되어
세계사를 새로이 창조하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형상 없이 순수하고 자유자재하여
일체를 현성(現成)하는 생명의 선법문을 들겠다.


 
어떤 스님은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祖師)를 초월한 말입니까?”

운문 스님이 이르되,

“호떡[餬餠]이니라.”


설두(雪竇) 스님이 송(頌)하기를

초월함을 말하는 선객의 물음이 많으니
꿰맨 자국에 틈이 나서 해어짐을 보느냐?

호떡으로 막음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천하에 잘못 전해 왔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오늘에 내일 음식을 걱정하지 말지니
살림살이는 오직 발우 가운데 있느니라.

이 소식을 알겠는가!
본래 털끝만큼의 힘도 쓰지 아니함이라.
불길 속에서 사마귀가 호랑이를 삼키느니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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