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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임제록 연의/1장 解題. 1)선(禪)과 현대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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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4-16 09:09 조회1,583회 댓글0건

본문

서옹스님의 [ 임제록 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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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解題

선(禪)과 현대문명


임제록은
예로부터 선서(禪書)중의 왕이라고
존중받았던 어록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명확히 밝히고
자유자재하게 행동하는
차별 없는 참사람[眞人]을 설파한 것으로
동서고금 중에서
제일 귀중한 진서(珍書)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철학자인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郞)박사는
2차 대전 중에
모든 귀중한 서적이
불타 없어지게 되겠다고 걱정을 했을 적에
임제록만 타지 않고 남으면
우리는 만족한다고 하였다.

현재 프랑스 등 외국의 대학교에서도
임제록을 강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불교조계종은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이어오면서
임제록이 현존하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래서
여러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의
요청에 따라 임제록을 간행하게 된 것이다.

임제스님이 선풍(禪風)을 진양(振揚)한
하북(河北)의 진주(鎭州)는
당시만 해도 당의 중앙정부와 대결한
하북삼진(河北三鎭)의 하나로서
황실의 지배가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이었다.

토착한 호족은 이름만 절도사일 뿐,
독재 권력을 떨치고
중앙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방은
신흥 권력자 사회의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서
한편으로는
옛 전통과 권위를 강력히 부정하는 동시에
다른 면에서는
새 실력자를 가진 통치자로서
굳센 자기권위와 문화교양 형성이 요청되었다.

거기에는
파괴와 건설의 격동적 교체가 있고
이 격동에 강력히 대처할 수 있는
주체성을 깊이 자각함을 요구한다.

이러한 강한 자각은
군사, 경제 기타 모든 사회생활을
구체적 실력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근원적 주체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자유자재하게 행하는
임제선(臨濟禪)이 성행했던 것이다.


다음은
현대의 과학문명과
임제선과의 문제를 간단히 말해 보겠다.

중세기는 서양에 있어서
인간은 신에게 절대복종하고
신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16세기에 신은
인간이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성을 각성하여
인간이 중심일 되는
오늘의 과학문명을 점차 발전시켰다.

물질을 기저(基底)로 하는 과학은
자기 입장 자체내(自體內)를 향하여
반성하는 방향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과학의 입장은
세계로부터 또는 세계 안의 인간으로부터
초월의 차원으로 통하는 길이 막힌 것이다.

과학문명은 인간과 세계
그 존재의 기반이 되는
초월적, 근원적인 바탕이
없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원자력 등의 과학력(科學力)과
강대국들의 집단력(集團力)과
여러 가지가 복잡하고 정글화 함에 따라
근원적 ‘바탕’을 상실한 오늘의 인간들은
자기존재의 기반과
인간관계와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근본구조는
다(多)를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일과
근원적 통일적 일(一)에서
창조형성해지는 다(多)가
서로 융화되어 있어 둘이 아니다.

다(多)가 없는 일(一)은
내용이 없는 단순한 허공이고
일(一)이 없는 다(多)는
통일이 없는 단순한 분열인 것이다.

복잡화되고 정글화되어 있어
근원적 바탕이 되는 일(一)을 상실한 것은
현대문명의 큰 병통(病痛)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분열, 혼란, 허탈, 불안정,
혼미, 회의, 노이로제, 염세 등 소위 문명병은
근원적 통일적 일(一)을 상실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근본의 일(一)은 더욱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대는
근본의 일(一)을 상실했으므로
인간은 분열과 혼미와 불안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종교나 점술에 의지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수가 많다.

이 원시적인 종교나 점술은
임시적인 진통제도 못 되고
더욱 더 분열, 혼미, 불안정으로 떨어져서
현대의 문명병통(文明病痛)을 치료하지 못하고
도리어 악화시킬 큰 위험에 처해 있다.

복잡한 정글 속에 있는
오늘의 일반사람들은 주체성을 상실하여
그때그때 일어나는 욕망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속한 것인 만큼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이 욕망은
초월적 근원적인 차원의 전체의 연관 속에 있어서
체계적 위치에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반의 근원적 바탕이 없는 욕망은
그 자체가 진실한 것(객관적 타당성)이 아니다.

욕망은 항상 욕구불만에 빠지고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주체성을 잃게 된다.

욕망의 지배에 끌려서 사는 곳에는
자유도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

아무 가치 없는 생활이다.

욕망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노예적 종속물로 삼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서로 상극이 되고, 서로 헤치게 되고,
결국은 다함께 파멸하게 된다.

폭력도
욕망에서 나오게 되고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권모술수도
욕망의 입장에서 지성을 악용함으로써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욕망만 쫒아 줄달음친다면
타락과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동양은 예부터 전체주의 국가주의였다.
전체주의는
개인에 대하여 절대복종을 요청한다.
그래서 옛 동양은
군주독재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성군의 덕치(德治)라 해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선형(垂直線形)의 정치체제 아래서는
진충보국주의(盡忠報國主義)는 성행할지 모르나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생각과 행동은 발생할 수 없다.

거기서는
개인의 창의성이 개발될 수가 없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과학적 사색과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를 숭상했는데
이것은 인격적 도덕적으로
자타가 동등한 지위에 입각하여
서로 존경하는 때에 성립하는 것이다.

주종(主從)의 예라든가,
군신의 예라는 것은
힘의 관계이지 예라고는 할 수 없다.

굴종의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봉건주의 아래서 말하는 예라는 것은
일종의 의식습관이다.
군주는 인덕(仁德)을 베풀고,
백성은 홍은(鴻恩)을 입어서
감지덕지하여 어찌할 줄 모른다.

이러한 위력(威力)관계 아래서는
인격적 자주성은 있을 수 없으며
예의 윤리적 대등격성(對等格性)도 엿볼 수가 없다.

여기에는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자주적으로 행하는 길을 봉쇄해 버리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족을 사랑하고 중대시하는 정신이 있는데
이것은 미풍(美風)이라 하겠다.

그러나 가족을 무조건 존중해서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봉건주의가 된다.

더욱이 주종관계에서
가정질서를 형성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위로부터
향하적(向下的)으로 은혜를 베풀고
아랫사람은 복종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애가(愛家)의 심리상태에서는
개인적 책임감, 자주적 사색력, 풍부한 창의
또는 세계성을 띄는 행동기풍(行動氣風)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만을 편중하는 인습적 제도 아래에서는
자주적 정신이 충분히 개발되지 못하여
자주적으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다.

그리고 집단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개인이
집단조직의 독립단위라는 의식이 없다든지
혹은 충분히 발달하기 못하면
개인이 자주적이고 자발적으로
집단생활의 행복 또는 향상을 위하여
공헌하겠다는 의욕이 우러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족의 남녀노소가
차별 없는 참사람[眞人]의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고 개성을 살려서
상호 저해하지 않으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서로 도와
조화가 잘 되는 가정이 이상적이라고 하겠다.

타자적 신(神)에 의속(依屬)하고
타자적 신에 절대복종하는 것을
반대하는 현대의 인간은
자주적이며 자율적이고 적극적 능동적이며
낙천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성적으로 세계를 형성할 수있다는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면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이성적으로 개발하고
이성적으로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구경적(究竟的) 해결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성적 입장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비판해 보자.
그러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생사문제를 다뤄 보기로 한다.

누구든지 죽지 않고 살려고 한다.
생(生)은
사(死)가 없는 생이라야
오직 참다운 생이라 하겠다.

그러나 생은 결국 죽고 만다.
생은 반드시 죽음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생사적(生死的) 생명이다.

이 생명 자체는
이율배반으로 성립한 것이다.

생사적 생명은
죽음이 없는 순수한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생이라 할 수 없다.
생명 자체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사적 생명을 절대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에 대한 죽음은
상대적 이율배반이라 하겠다.

생사적 생명은
생명자체가 이율배반이므로
절대적 이율배반이라 하겠다.

다음은 가치론적으로 말해 보겠다.

근대의 인간은 이성적 생활을 하고 있다.
이성적 가치생활은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이 대립한다.
이성적 생활은
반이성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극복해 나간다.

이성적 생활은
이성적인 것이
반이성적인 것을 다 극복해 버려서
반이성적인 것이 아주 없어져서
순수한 이성적인 것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이성적인 것이 없는 순수한 이성적 생활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이성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반이성적인 것과 대립한다.

이 이성적 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이성적 생활의 입장에서는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이
근본구조가
절대적 이율배반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성을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성의 세계도
주관과 객관의 양자대립에서
작위(作爲)하는 것이므로
실재 자체가 자각 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조작이다.

이성의 세계는 결국
주관주의적 입장을 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이성 자체의 위기야말로
근원적 본체적(本體的) 위기인 것이다.

존재론적인 생사적 가치나
가치론적인 가치, 반가치적 자기(自己)가
두 개가 아니라
실제로는 결합이 되어서
인간의 본질적인 구체적 구조로 되어 있다.

말을 하자니까
두 개로 나누어서 했을 뿐이다.

이 절대 이율배반적 자기를
극복하는 문제를 말하기로 하자,

이 절대 이율배반적 자기가
절대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이율배반의 근저로부터
그것을 극복하는
참나[眞我]가 자각하는 것이
선(禪)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다.

절대 이율배반은
참나가 자각하는 계기는 되지만
그 계기가 극복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성적. 이성적. 생사적
자기의 심갱(深坑)에 있는
절대 이율배반을 초월한 참나[眞我]가
자기 자신을 자각함으로 인해서
감성적 이성적 생사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우에 있어서 깨달은 참나는
절대이율배반의 밖에,
다시 말하면 절대이율배반에 대해서
격절적(隔絶的) 타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이율배반의 안에서
그것을 탈피하여 자각하는 것이다.

참나[眞我]는
절대이율배반을 탈피한 자기가 된다.
이것이 궁극적 진실재(眞實在)인
참나, 진실재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차별 없는 참사람' 이라고 한다.

임제스님이 말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그러므로 참사람은
본래 각(覺)한 참사람인 것이다.

새로 각(覺)했다는 것도 없이
본래 참사람인 것이다.

참사람은
생사도 없고,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고
계급 민족, 인동, 국가,
심지어 생물과 우주, 시간과 공간의 차별도 없다.

모든 한정(限定)을 절(絶)하고
독탈무의(獨脫無依)하여서
일체 계박(繫縛)을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것이다.

이러한 참사람이야말로
더욱 복잡화하는 세계 중에서
더욱더 분화 발전하는 역사의 현실에서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또는 현실 도피와
신불(神佛)에 의지해서
자기상실에 빠지지 아니하여
절대자주(絶對自主),
절대자율(絶對自律)로 살아나갈 수가 있다.

참사람[眞人]은
또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발하는
근원적 주체가 된다.

그래서 과학적 지성과 생(生)의 충동까지라도
참사람은
타당한 체계적 정위(定位)를 지시해서
대용전창(大用全彰)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참사람은
다시 세계를 형성하고 역사를 창조하면서
어디에나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다.


다음에 사랑에 대하여 말해 보기로 하자.

기독교에 있어서는
절대적 사랑은 신(神)만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신의 절대적 사랑에 의해서 뒷받침이 된
상대적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애(絶對愛)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래 절대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비의 주체는
참사람의 모습이고 바로 현실의 모습이다.

모든 행동은 자비로부터 나온다.

이 자비가 상(上)으로부터
하(下)로 향해 행하는 수도 있으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평등을 행하는 것이다.

이 평등도
보통으로 말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평등을 주장하지만,
보통, 인간을 안으로 초월한
참사람의 입장에서의 평등이라야만
진정 구경(究竟)의 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은 본래 참사람이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서로 횡적 넓이의 평등이라하겠다.

사람 자체의
종적 깊이의 내용적인 평등의 성격이
불교의 평등이다.

인간의 근본 바탕은 허공과 같아 한정할 수 없다.

무연대비(無緣大悲)는
보통의 사랑, 즉 애견(愛見)의 자비가 아니라
자성지혜(自性智慧)를 바탕으로 하는
절대평등(絶對平等)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옛날의 선(禪)은
개인을 구제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오늘은 세계가 좁아져서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가 세계성을 띠어서
세계의 위기를 타개하지 않으면
개인도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세계 또는 집단의 법칙을 세우는 데에
선(禪)으로서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개체도 또한
이것을 성립시키는 전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개체를 말할 때에 전체는 본래 그 속에 있고
전체라고 할 때에 개체는 본래 그 속에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을 절대(絶對)로 하는 것이므로
자연이 다(多)를 절대로 하는
다원적인 사회관. 국가관이라 하겠다.

전체주의는
사회 전체를 절대로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개인의 집합이 사회가 아니라
사회는
다원적 성원을 초월한 전체적 일(一)이라 한다.

이 전체적 일(一)을
절대로 하는 데에 사회주의가 성립한다.

전체주의의 단점은
개인의 자주, 자유, 창의를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고
민주주의의 단점은
다(多)의 방종과 무질서가 되기 쉽다.

그런데 선(禪)은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多卽一)’이어서
‘일다일여(一多一如)’의 입장이다.

일(一)이 즉 다(多)이므로 전체주의를 지양하고
다(多)가 즉 일(一)이므로 민주주의를 지양해서
고차원(高次元)의
새로운 체제가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는
중세적 신율성(神律性)과
타율성을 비판이탈하고
현대문명을 창조하고 있는
근대의 인간주의의 절대모순을
해결초월(解決超越)한
차별 없는 참사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참사람의 사명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가
각자의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를 탈각(脫却)하여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세계 역사를 형성하는 자비대원을 가지는 것이다.

오늘 인류는
모든 과거의 전통이 깨지고, 주체를 상실하여
윤리질서가 무너져서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런 이때에
임제록 간행을 계기로 해서
참사람을 깨닫고,
참사람의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성취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여
세계평화를 이룩함에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다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임제록을 씀에 있어서
아사히나 소우겐(朝比奈宗源)선사가 역주한
이오나미문고본(岩波文庫本)의 임제록과
아키츠키 료민(秋月龍珉)교수의 임제록을
참고했다.

이 두 책은
이번 임제록을 쓰는데
역사적 어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종지상(宗旨上)으로 달리 보는 점은
명백히 쓰기로 하였다.

종지에 있어서는 해설할 수 없으므로
착어하여 표현하였다.

원문은 특히
아키츠키 료민(秋月龍珉)교수의
임제록을 저본(底本)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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