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연의/ 3-2.진정한 견해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스승 서옹스님

임제록 연의/ 3-2.진정한 견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5-17 03:25 조회1,662회 댓글0건

본문

서옹스님의 [ 임제록 연의 ]
+++++++++++++++++++++++++++

3장 示衆

진정한 견해


임제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진정한 견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진정한 견해를 얻게 되면
죽고 나는 데에 물들지 않고
가버린다거나
머물러 있는 데에 자유자재하다.

수승함을 구하고자 원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자연히 오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여,

옛날부터 선덕스님들은
다 사람을 구해내는 길이 있었다.

내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다만 너희가
다른 사람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행동하고 싶거든 행동하게 함이니
결코 주저하지 말라.

오늘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병이 어디에 있느냐?

병은 스스로 믿지 않는 데에 있다.

네가 만일
스스로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면
바로 분망(奔忙)하게 일체경계를 쫒아 이끌려
여러 가지 경계에 뺏겨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

네가 만일
생각에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쉬면
바로 조사인 부처와 다르지 않다.

네가 조사인 부처를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다만
나의 면전에서 법문을 듣는 너 자신이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이 철저히 믿지 않고
바로 밖으로 향하여 달려서 구한다.
그리하여
설사 구해 얻었다 하여도
이것은 다 문자의
훌륭한 껍데기 모양은 된 것이나
마침내
저 산[生] 조사(祖師)의 뜻은 얻지 못한다.

그르치지 말라, 모든 선덕이여,
이때에 조사인 부처를 만나지 못하면
나고 죽기를 영원토록 하며,
삼계에 윤회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경계에 이끌려가므로
당나귀나 소의 뱃속에 나게 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여,
산승이 보는 바대로 말하면
석가부처님과 다르지 아니하다.

오늘
여러 가지 작용하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섯 가지
신령스러운 빛이 잠깐도 쉰 일이 없다.

다만 이와 같이 볼 수가 있으면
참으로 일생 무사한 사람이다.

대덕이여,
삼계가 편안치 못함이
마치 불난 집과 같아서
네가 오래 머물러 살 곳이 못된다.

무상한 살귀(殺鬼)는 찰나 간에도
귀천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아 간다.

너희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고 싶거든
오직 밖에서 구하지 말라.

너희 한 생각 마음 위에 청정한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법신불이요,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분별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보신불이며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차별 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화신불이다.

이 세 가지 불신(佛身)은
지금 목전에서
법문을 듣는 사람인 네 자신이니,
이는 오직
밖을 향하여 달려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공용(功用)이 있는 것이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경론가(經論家)에 의하면
세 가지 불신(佛身)을 가져
구경궁극(究竟窮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승이 보는 바로는 그렇지 않다.

이 세 가지 불신은
오직 이름과 말이고
또한 세 가지 의지(依支)인 것이다.

고인도 말하기를
‘불신(佛身)은
현상(現象)에 의지해서 세운 것이고
불국토는
법성(法性)의 본체(本體)에
의지하여 의논(議論)한 것이다.’
라고 했다.

법성(法性)의 불신(佛身)이나
법성의 불국토는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 명백하다.

대덕이여,

그대는
이 마음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이
모든 부처의 본원이고
일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돌아갈
자기 집인 줄 알아야 한다.

그대의 육체는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들을 줄 모르고,
오장육부도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들을 줄 모르며,
허공도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들을 줄 모른다.

대체 이 무엇이
법문을 설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냐?

이것은 바로 너다.
즉 목전에 역력한 것,
한낱 형상도 없이
절대 홀로 자체만으로 명백한
이것이 법문을 설할 줄 알고 법문을 들을 줄 안다.

만일, 이와 같이 볼 수 있으면
바로 조사인 부처와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때에든지
다시는 간단(間斷)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이것이다.

다만
망념이 생하면 참 지혜가 막히며
생각이 동하면 본체와 달라진다.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만일 나의 견해로 간요(簡要)하자면
심히 깊어서 해탈 아닌 것이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여,

심법(心法)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꿰뚫어 통하여 있다.

눈으로는 본다 말하고
귀로는 듣는다 말하며
코로는 향기 맡고
입으로는 담론(談論)하고
손으로는 잡고 발로는 돌아다닌다.

이것은
본래로 일정명(一精明)인데
나누어서 육화합이 된다.

다시 말하면
근본 한마음이 나누어져서
육근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그 한마음이 없는 것이므로
곳곳마다 해탈이 된다.


내가 이렇게 설하는 것은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모든 내달아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여
저 옛사람의 쓸데없는 기경(機境),
즉 말과 작용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여,
내가 보는 바로는
보신불, 화신불의 머리를 앉아 끊나니
십지수행(十地修行)을 성취한 사람도
고용살이와 같고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부처도
형틀을 젊어지고 자물쇠를 찬 놈이요,
나한과 벽지불은
마치 뒷간의 똥과 같고,
보리열반은 당나귀를 맨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다만 도를 닦는 사람들이
무한의 시간이 공한 줄 깨닫지 못하므로
이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일 진정한 도인이라면
절대로 이와 같지 않다.

다만 연을 따라
과거에 지은 업을 없애서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의복을 입으며
가고 싶으면 바로 가고,
앉고 싶으면 바로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구하는 마음이 없다.

왜 그러한가?

고인(古人)이 이르되
“만일 업을 지어 가지고서 부처를 구하려고 하면
부처는 바로 생사윤회의 큰 조짐(兆朕)이다.”
라고 했다.

대덕이여,
시간을 아껴라.

다만 박으로 부산하게 허둥대면서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우며,
명자(名字)에 집착하고, 언구(言句)에 집착하며,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며,
선지식을 구하여 사량복탁(思量卜度)하는구나.

잘못하면 안 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아,
너희들에게는
다만 하나의 부모가 있다.
다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느냐?

네 자신이 반조해 보아라,
고인이 말하기를
“연약달다(演若達多)는
자기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잘못 생각했었지만
구하는 마음이 쉬었을 적에 바로 무사하였다.”
고 했다.

대덕이여,

어쨌든 평상(平常)하게 하라.

아무 조작이 없는
참나[眞我]에서 행하고
껍데기 조작을 하지 마라.

세상에는
아무 조백(早白)도 모르는
머리 깍은 바보 종이 있어서
있지도 않은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을 문득 보고
동을 가르치고 서를 가르치며
맑은 날씨를 좋아하고 비오는 날씨를 좋아한다.

이러한 것들은
다 반드시 벌을 받아서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철환(鐵丸)을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훌륭한 가문의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여우떼한테 홀려서 괴상하게 된다.

눈 먼 바보 종아
먹은 밥값을 내라고 청구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먼저 비추고[照]나서 작용[用]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며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기도 하며,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기도 한다.

먼저 비추고 나서 작용하는 것은
주관[人]의 경우이고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는 것은
대상[法]의 경우이다.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경우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은 격으로서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아내고
침으로 아프게 찌르는 일이다.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는 경우는
물음도 있고 대답도 있으며
주객을 모두 인정하여
물과 진흙이 섞이듯
근기에 따라 중생을 지도하는 것이다.

테두리를 벗어난 대근기라면
떠보기도 전에 재빨리 일어나서 갈 것이니
이래야만 조금은 되었다 하겠다.”


< 착어(着語) >

有佛處에 不得住하고
無不處에 急走過하야
三千里外에 逢人커든 莫錯擧하라.

野老不知堯舜德하고
鼕鼕打鼓祭江神이로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말고
부처 없는 곳에 급히 달려 지나서
삼천 리 밖에 사람을 만나거든
그릇 들어 말하지 마라.

들늙은이는
요순 임금님 덕을 알지 못하고
동동 북을 치며
강귀신에게 제사지내도다.


※※※ 주 ※※※※※※※※※※※※※

1) 불조(佛祖) :
조사인 불(佛). 불조(佛祖:불타의 조사)가 아님.

2) 다반용처(多般用處) :
육도신광과 같다.

3) 육도신광(六道神光)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의 작용.

4) 삼종신(三種身) :
법신은 법성의 이체(理體)이니
대일여래(大日如來)가 곧 법신불이다.
보신(報身)은
인위(因位)의 원(願)과
행(行)의 공덕(功德)으로 얻은
과위(果位)의 불(佛)이니
아미타불이 곧 보신불이다.
화신은
중생제도를 위하여
차세(此世)에 응현(應現)한 불(佛)이니
석가모니불이 화신불이다.
응신(應身)이라고도 함.

5) 고인운의의립토거체론
(古人云依義立土據體論) :
자은규기(慈恩窺基 : 632~682)의
**법원의림장(法苑義林章) 권7**에서
인용한 듯 하나
어구(語句)가 부동(不同).

6) 물일개형단고명(勿一箇形段孤明) :
형단(形段)은
물질적 또는 정신적인 모든 형체.

7) 정생지격상변체수(情生智隔想變體殊) :
이통현(李痛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의 서문에 있는 말.
‘정(情)’과 ‘상(想)’은
분별망심(分別妄心)이고
‘지(智)’와 ‘체(體)’ 반야지혜(般若知慧)와
진여본체(眞如本體)를 말함.

8) 일정명(一精明) :
본심(本心)을 말함.

9) 육화합(六和合) :
육근과 육경이 화합하여
육식(六識)이 생(生)하는 것.

10) 상타고인한기경(上他古人閑機境) :
상(上)은 반연(攀緣)한다는 뜻.
기(機)는 심기(心機)의 뜻이니 선사의 주관 작용,
경(境)은 외경(外境)의 뜻이니
객관적 형상으로 표현한 것.
고인(古人)의 언구행동(言句行動)을 말함.

11) 객작아(客作兒) : 고용살이 하는 사람.

12) 부모(父母) :
본심(本心), 차별없는 참사람[無位眞人].

13) 고인연약달다실각두운운
(古人演若達多失却頭云云) :
**능엄경**에 있는 이야기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존자를 위해 설하셨다.
옛날 室羅城中에 演若報達란 사람이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즐거움을 삼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거울 뒤쪽을 잘못 보고
얼굴이 안 보이니까 놀래어
자기 머리가 없어진 것이라
잘못 알고 찾아다녔다 한다.

14)호인가남녀(好人家男女) :
호인가는 착한 집, 남녀는 아이의 뜻이나
여기서는 일반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15) 할루생(瞎屢生) :
할(瞎)은 눈멀었다는 말.
누(屢)는 어리석다는 말이니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


師乃云(사내운),
今時學佛法者(금시학불법자)는
且要求眞正見解(차요구진정견해)니,

若得眞正見解(약득진정견해)하면
生死不染(생사불염)하고,

去住自由(거주자유)하야
不要求殊勝(불요구수승)하야도
殊勝自至(수승자지)니라.

道流(도류)야,
祇如自古先德(지여자고선덕)은
皆有出人底路(개유출인저로)니라.

如山僧指示人處(여산승지시인처)는
祇要儞不受人惑(지요이불수인혹)이니
要用便用(요용변용)하야,
更莫遲疑(갱막지의)하라.

如今學者不得(여금학자부득)은
病在甚處(병재삼처)오
病在不自信處(병재부자신처)니,
儞若自信不及(이약자신불급)하면
卽便忙忙地(즉변망망지)하야
徇一切境轉(순일체경전)하야
被他萬境回換(피타만경회환)하야
不得自由(부득자유)니라.


儞若能歇得念念馳求心
(이약능헐득염념치구심)하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儞欲得識祖佛麽(이욕득식조불마)아?

祇儞面前聽法底是
(지이면전청법저시)니
學人信不及(학인신불급)하고,
便向外馳求(변향외치구)하며
設求得者(설구득자)라도
皆是文字勝相(개시문자승상)이요,
終不得他活祖意(종부득타활조의)니라.

莫錯(막착)하라
諸禪德(제선덕)아,
此時不遇(차시 불우)하면
萬劫千生(만겁천생)을
輪廻三界(윤회삼계)하야
徇好境掇去(순호경철거)하야
驢牛肚裏生(여우두리생)이로다.

道流(도류)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인댄
與釋迦不別(여석가불별)이라.

今日多般用處(금일다반용처)가
欠少什麽(흠소심마)오?
六道神光(육도신광)이
未曾間歇(미증간헐)이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祇是一生無事人(지시일생무사인)이니라.


大德(대덕)아,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此不是儞久停住處
(차불시이구정주처)니
無常殺鬼(무상살귀)가
一刹那間(일찰나간)에
不揀貴賤老少(불간귀천노소)니라.

儞要與祖佛不別(이요여조불불별)인댄
但莫外求(단막외구)어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淸淨光(청정광)은
是儞屋裏法身佛(시이옥리법신불)이며,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分別光(무분별광)은
是儞屋裏報身佛(시이옥리보신불)이요.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差別光(무차별광)은
是儞屋裏化身佛(이시옥리화신불)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
(시이즉금목전청법저인)이라.

祇爲不向外馳求(지위불향외치구)하면
有此功用(유차공용)이니라.

據經論家(거경론가)하면
取三種身(취삼종신)하야
爲極則(위극측)이나
約山僧見處不然(약산승견처불연)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名言(시명언)이며
亦是三種依(역시삼종의)니라.

古人云(고인운),
身依義立(신의의립)이요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이니라.


大德(대덕)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
(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是儞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나니,
是什麽(시심마)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
(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한
是這箇(시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觸目皆是(촉목개시)언마는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所以輪廻三界(소이윤회삼계)하야,
受種種苦(수종종고)하나니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無不甚深(무불심심)하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니라.


道流(도류)여.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在眼曰見(재안왈견)이며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在鼻齅香(재비후향)하고
在口談論(재구담론)하며,
在手執捉(재수집착)하고
在足運奔(재족운분)이라.

本是一精明(본시일정명)이
分爲六和合(분위육화합)이니,
一心旣無(일심기무)하면
隨處解脫(수처해탈)이로다.

山僧與麽說(산승여마설)은
意在什麽處(의재심마처)오?

祇爲道流(지위도류)가
一切馳求心(일체치구심)을
不能歇(불능헐)하야
上他古人閑機境
(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道流(도류)야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하면
坐斷報化佛頭(좌단보화불두)라.

十地滿心(십지만심)은
猶如客作兒(유여객작아)요.
等妙二覺(등묘이각)은
擔枷鎖漢(담가쇄한)이요.
羅漢辟支(나한벽지)는
猶如厠穢(유여측예)요.
菩提涅槃(보리열반)은
如繫驢橛(여계려궐)이니
何以如此(하이여차)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
(지위도류부달삼지겁공)일새
所以有此障礙(소이유차장애)니라.

若是眞正道人(약시진정도인)인댄
終不如是(종불여시)니.
但能隨緣消舊業
(단능수련소구업)하고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하야
要行卽行(요행즉행)하며,
要坐卽坐(요좌즉좌)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
(무일념심희구불과)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古人云(고인운),
若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이면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라하니라.


大德(대덕)아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祇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莫錯(막착)하라.

道流(도류)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古人云(고인운),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흘처즉무사)로다.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차요평상)인댄
莫作模樣(막작모양)이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
(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便卽見神見鬼(변즉견신견귀)하며,
指東劃西(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向閻老前(향염노전)하야,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好人家男女(호인가남여)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著
(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便卽捏怪(변즉날괴)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示衆云(시중운),
我有時先照後用(아유시선조후용)하며,
有時先用後照(유시선용후조)하고,
有時照用同時(유시조용동시)하며,
有時照用不同時(유시조용부동시)니라.

先照後用(선조후용)은 有人在(유인재)요.
先用後照(선용후조)는 有法在(유법재)요.

照用同時(조용동시)는
駈耕夫之牛(구경부지우)하며,
奪飢人之食(탈기인지식)이니
敲骨取髓(고골취수)하고,
痛下鍼錐(통하침추)요.

照用不同時(조용부동시)는
有問有答(유문유답)하며
立賓立主(입빈입주)하야
合水和泥(합수화니)하야
應機接物(응기접물)이니,
若是過量人(약시과량인)인댄
向未擧已前(향미거이전)하야,
撩起便行(요기변행)이라
猶較些子(유교사자)니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57205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종무소 - Tel : 061-392-7502 / Fax : 061-392-2081

기도접수처 - Tel : 061-392-0100 / Fax : 061-392-1143   템플스테이 - Tel : 061-392-0434

Copyright © 2020 대한불교조계종 백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