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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의 향기

진묵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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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1-24 07:13 조회2,4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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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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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거촌(佛居村)의 부처

전주 서방산(全州 西方山)의
봉서산(鳳栖山)의 봉서사(鳳栖 寺)에
한 사미(沙彌)가 있었다.

그 사미는 열심히 경전을 읽었으며,
조석으로 법당에
예불 올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절의 주지 스님은
그 사미에게 신중단(神衆檀)에도
향을 사루어 예배하게 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예불 할 때에
언제나 신중단에 예배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한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주지스님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이
우리들 소신(小神)이 해야 할 일이온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다시는
부처님으로 하여금 새벽과 저녁에
예향(禮香)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소신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신중들의 그 말은
사뭇 애원하듯 하였고 또 간절하였다.

꿈을 깬 주지스님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그로부터 그 사미에게
신중단의 예향을 그만 두게 하였으며
그 사미를 남달리 대우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그 절의 대중들은
모두 「부처님이 다시 태어나셨다.」고 하여,
그 사미를
작은 부처(小佛 또는 小繹迦)라고들 하였다.


이 사미의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나중에 그 호를 진묵(震默)이라고 하였는데
전라도 만경땅 불거촌(萬傾懸 佛居村)에서
명종(明宗) 17년(1562)에 태어났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에 어머니 조의씨(調意氏)의 품을 떠나
전주의 봉서사로 가서 머리를 깎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불경 공부에 열중하였고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도
경전의 깊은 뜻을 통달하였다.

그래서 봉서사의 스님들이
그를 범상한 사미가 아니라고 여겼었는데
주지스님의 꿈 이후로는
더욱 그를 남달리 보았고
또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신통불가사의
(神通不可思議)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가 만년에 입적을 앞두고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켜
「석가 부처님(釋迦佛)의 그림자이다.」
라고 하였다는 일들을 미루어서,
당시뿐만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부처님의 후신(釋迦後身)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가 태어난
불거촌(佛居村 부처마을)
이라고 하였다는 것도
그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틀림없는 석가부처님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신장(神將)이 그를 옹위하였고,
나한(羅漢)들이 그에게
머리를 얻어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할 것이다.


2. 지극한 효심

어릴 때 출가한 뒤로
불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에만 힘을 썼으며,
도행이 뛰어나고
법력이 높은 큰 스님이 된 그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변함이 없었다.

사미시절을 봉서사에서 보내고
한 사람의 승려로서의
수업을 거친 그는 그곳에서 멀지않은
일출암(日出庵)에 있었다.

그 때 그는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

 ㅡ 지금의 完州郡 龍進面 牙中里)
으로 모셔 와서 살게 하였는데,
왜막촌은 바로 절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아침, 저녁 내왕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출가 수행승이기 때문에
한 집안에서는
모시고 살수가 없는 처지였으나
자신이 거처하는 절 밑 마을에 모심으로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출가자의 몸이었으나
절에 있으면서
마을집에 사는 어머니와
누이 두 식구를 돌보았다.

그렇다고
승려의 본분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왜막촌에 모기가 많아서
여름이면
그 어머니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그는 산신(山神)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내쫓게 하였고,
그로부터 그 마을에는
모기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진묵대사의 지극한 효성과
그리고 그가 또 얼마나
속가에 있는 어머니를 지극히 보살폈던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정성스레 장례지내고
애통해 한 그의 제문(祭文)을 통하여서
더욱 잘 알 수가 있다.








●진묵대사의 모제문(母祭文)●


“태중에
열 달을 품으신 은혜 어찌 갚으오리까?

슬하에 삼년을 기르심도 잊을 길 없나이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할지라도
아들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함만 앞서는데,

인생 백년 이라더니
백년도 다 못 채우셨으니
어머니의 수명이
어찌 이리도 짧으시나이까?

표주박 하나로
길 위에서 걸식하며 사는
나는 이미 그러하다 할지라도

규중에 혼자 남은
어린 누이로는 어찌 슬프지 않으리까!

이제 벌써 상단법문을 마치고
하단법요도 마쳐서
스님들은 각자 제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 또한 겹겹이 쌓인 이 산중에서
어머니의 혼은 어디로 돌아 가시렵니까?

아, 슬프고 슬픕니다!“




그는 그 글에서
열 달 동안 태중에 간직하고
삼년동안 똥오줌 주물러서 고생하며 키워 주신
그 은혜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으며
백년도 못 사시고 가신 무상함을 슬퍼하고
아직도 미혼인 홀로 남은 누이를 걱정하며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의 정을
구구 절절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효성은
어머니의 생전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사후에도 영원히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출가한 자신은 후손이 끊겼으므로
대대손손이 부모의 제사를 받들 수도 없고
그 무덤도 돌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자손이 없어도
언제나 제사와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시집을 가버리면 남의 집 식구가 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만경(萬頃)북쪽
유앙산(維仰山)에다 장사를 지냈다.

이곳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덤 터로서
비록 후손이 없다 하여도
영원히 향화가 그치지 않고
길이 무덤을 돌보는 손길이
이어질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곳을 일부러 물색하여
어머니의 무덤을 모셨던
진묵대사의 효심은 적중하였으니,
그 무덤을 돌봐 주거나
제사를 지내 주거나 하면
반드시 농사일이 잘 되며
또는 그 밖의 이익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그 무덤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무덤은 잘 보존되어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흔히들 진묵대사의 신통력이나
풍수지리에 밝았다는 고사로 말하고는 있으나,
실은 진묵대사의
영원불멸하는 효성의 마음이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출천의 효자인 진묵대사의 효심이
길이길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유희삼매(遊戱三昧)의 진도인(眞道人)

진묵대사가
변산(扶安邊山)의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 시자(侍者)와 단 둘이서 있었는데,
어느 날 시자가
속가에 제사를 모시러 절을 내려가게 되었다.

스님의 공양을 미리 지어서
상을 차려 탁상 위에 올려놓고,

「스님, 공양을 여기 차려 놓았습니다.
내일 조반 때에 드십시오.」
하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뒤 마을로 내려갔다.

시자가 떠날 때
스님은 창가에 앉아서
봉창을 열어 놓고 거기에 한손을 뻗혀
창문이 바람에 닫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문지방에 얹어놓고
능엄경(凌嚴經)을 읽고 있었는데,

그 시자가 속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절로 돌아왔을 때 에도
스님은 여전히
어제 그대로의 자세대로 앉아
능엄경을 들여다보고 앉아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시자가 탁상 위를 보니
어제 차려 놓은 밥상이 그대로 놓여 이었고,
문지방에 올려놓은 스님의 손가락은
바람에 닫혔다가 다시 열리고 하는
봉창문에 상채기가 생겨서
피가 흘러 있었다.

깜짝 놀란 시자가 큰 기침을 하면서,

「스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하니,
그때서야
경에서 눈을 들어 시자를 돌아보고,

「애야 마을에 간다더니 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났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능엄삼매(凌嚴三昧)에 들어 있었으므로
하루 밤이 지난 줄도 몰랐고
또 밥 먹는 것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이 월명암에는
밤이면 꼭 어디선가 동쪽으로부터
불빛이 비쳐 와서
진묵대사의 방을 밝혀 주었는데,
그 불빛은
전주 청량산(全州淸凉山)의
목부암(木鳧庵 ㅡ 나중에 遠燈庵이라함)
법당에 켜놓은 등불이었다는 것이다.

그 암자의 십육나한(十六羅漢)이
월명암에 있는 진묵대사에게
불빛을 멀리 비치도록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또 그가 상운암(上雲庵)에 있을 때,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는데
그 때 스님의 얼굴에는 거미집이 얽혀 있었고
앉아 있는 무릎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제자들이 거미집을 걷어내고
먼지를 들어낸 뒤에
큰 소리로 일깨우자
비로소 눈을 뜬 그는 돌아보면서,
「너희들
어째서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삼매에 들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얽혀 있는 불가사의한
많은 이야기와 이적(異跡)들은
모두 그의 유희삼매(遊戱三昧)의 세계에서
우러나온 소산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걸림과 막힘이 없는 도인이었던 그였으나
계율에는 매우 엄격하고 청정하였으니,
불음주(不飮酒)의 불계(佛戒)를 지켜서
곡차(穀茶)는 매우 좋아하였지만
술이라고 하면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72세 되는
인조 11년(仁祖 癸西) 10월 28일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시냇가로 가서 물에 비친 그림자를 가리키며
「저것이 서가부처의 그림자이다.」
라고 했으며
방으로 들어가
종승(宗乘)을 묻는 제자들에게
「명리승(名利僧)이긴 하나
서산스님에게 속한다.」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명종(明宗) 17년에 태어났었다.


그의 도량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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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아 산으로 베개하고,

月燭雲屛海作尊

달을 촛불삼고
구름을 병풍삼아
바다로 술통으로 하여,

大醉居然伋起舞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일어나서 신나게 춤을 추면

却嫌長袖掛崑崙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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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아 산으로 베개하고,

달을 촛불삼고
구름을 병풍삼아
바다로 술통으로 하여,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일어나서 신나게 춤을 추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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