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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의 향기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 / 수산지종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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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1-25 13:25 조회2,3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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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수산지종 대종사


신심과 공심, 화합, 정진 강조 …
소욕지족과 언행일치도 당부
2004년부터
고불총림 이끌며 후학 제접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는
‘눈폭탄’이 쏟아졌다.

그래도 태양은
간간히 차갑지 않은 햇빛을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큰스님들의 법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팍팍하기만 한 세상살이지만
그래도 불자들이 힘을 내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선지식(善知識)들의
감로수 같은
말씀과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 서옹스님의 뒤를 이어
지난 2004년부터
고불총림(古佛叢林)
방장(方丈)으로서
불갑사(佛甲寺)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불갑사(佛甲寺)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각진국사가 주석하던
14세기 전후에는
상주 대중만 1000여명,
40여동의 전각에
500여 칸의
대가람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불교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조선시대에도
적게는 200여명,
많게는 300여 스님들이 정진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쇄락했던 불갑사가
오늘날의 위상을
다시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수산스님이
1975년 절에 오면서부터다.

수산스님은
옛 자료들을 하나 하나 다시 모아
허물어져 가던
전각의 보수불사를 시작했고,
20여년 전 고시공부를 위해 이 곳에 왔던
만당스님이
수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창불사를 진행해 오늘에 이른다.

만당스님은
불갑사 사적기(史蹟記)를 바탕으로
16동의 전각을 복원하고,
9동의 전각을 보수하여
현재는 25동의 전각이
불갑사에 자리를 하고 있다.


수산스님은
“만당스님이 참 일을 잘 한다”며
“만암스님 뜻에 따라
젊었을 때는
거의 폐허에 가까웠던 절들을 다니며
다시 세우곤 했는데,
말년에 만당스님을 만나
이렇게 편안하게 산다” 며 미소를 지었다.

폭설이 잦은
서해안 지역의 기후 때문에
두 차례나 연기를 거듭한 끝에
1월 22일과 23일 양일간
대종사를 친견할 수 있었다.

스님은 1998년
재개원한 무각선원(無覺禪院)
염화실(拈花室)에서 정진하며
후학과 신도들을 만나고 있다.

1월 22일에도 부산에서
딸을 데리고 찾아온 부부와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린 후
스님에게
건강유지 비결에 대해 먼저 여쭈었다.

스님은
1922년생으로 올해 89세다.
“나는 어려서부터 환자였습니다.
담석증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병명(病名)을 모르니
치료를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어요.

어른들이 회가 돌아서 그렇다고 해
회충약을 먹어 보기도 하고,
누가 석유가 회를 잡는다고 해서
석유도 마셔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의술이 부족해서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더니,
나중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담석증이었던 거예요.

수술해야 한다고 했는데,
형편이 안돼서 못하고
죽어도
염불이나 하다가
죽자는 생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니
나중에 나도 모르게 비몽사몽간에
입속에 손을 넣어서
계속 느슨한 덩어리를
끝없이 끄집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10년간은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그 후에 다시 담석이 돌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수술을 해
쓸개를 떼어 냈습니다.
제가 쓸개 없는 놈입니다.
허허.”

스님은 수술 이후에도
신경통과 관절염, 소화불량 등의 병으로
“정신없이 부대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운동을 시작했다.


“몸이 너무 안 좋아
60넘어 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음식도 규칙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소식을 하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사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몸에 맞는 요가를 직접 ‘개발’해
매일 아침 운동을 한다.

밤 9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고
새벽 2시 30분이면
일어나 운동을 시작해
1시간여 동안 몸을 풀어준다.

운동 이후에는 예불을 올리고
1시간 이상 참선을 해
6시에는
전체 불갑사 대중과 함께 아침공양을 한다.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스님의 몸은 10대 그 이상이다.

말씀은 자연스럽게
스님의 출가인연으로 이어졌다.

“제 형제가 4남매였는데,
어려서 큰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형의 죽음으로 화병을 얻어
제가 1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3년상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탈상을 하자마자
17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다시 3년상을 치렀습니다.”

가혹한 운명이다.

스님에게
형과 부모님의 연이은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 느껴졌어요.
자식이 먼저 죽자
비탄에 빠져 슬퍼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면서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종적을 없애고자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집에서 가까웠던 백양사로 갔습니다.”

이때가 1940년,
스님의 나이 19살이었다.


-행자생활은 어떠셨습니까?

“그때 행자는
법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염불 같은 의식(儀式)을 가르쳐 놓으면
절 밖에 나가 못된 짓 하고 다닌다고 해서
스님들이 하나도 가르치질 않았어요.

어린 동자승 같으면 귀여워서
이것저것 시켜보기도 했을 텐데,
저 같이 다 큰 놈이 행자로 왔으니
절에서는 온갖 일을 다 시켰죠.

그때 절에서는
행자를 정말 종 다루듯 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면
행자들 다 도망갈 겁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중노릇하기 좋은 때입니다.”

-행자 생활이 끝나고
법안스님의 위패상좌가 되셨습니다.
위패상좌라는 말이 좀 생소합니다.

“예전에 스님들은 상좌를 받으면
책임지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학비와 양식을 다 내야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를 맡아 줄 스승이 없었어요.

그래서
만암스님께서
일찍 입적해버린
당신 상좌 법안스님의 위패상좌로
은맥(恩脈)을 정해 주셨습니다.

스승이 없다보니
저는 명부전, 극락전,
대웅전 지전(持殿) 소임을 보면서
보시로 나오는 돈 2원과
곡식을 받아 사중에 양식을 내고
학비를 삼아
어렵게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지전이 온갖 잡일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틈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스님은
세상에 없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자의 길에 나섰다.

모든 것을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고된 출발이었다.


-그래도
법안스님에 대한 말씀은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법안스님은 20년이 넘게
목사로 살다
만암스님과 한판 붙어
불교를 박살내러 왔다가
스님께 감화를 받아 출가했다고 합니다.

인연이지요.
그렇게 출가하게 된 스님은
강원 학인스님들에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는 드물게
미국에서 신학대학까지 졸업했던 분입니다.

만암스님께서도
상당히 아꼈던 스님이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일찍 요절한 제자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겠지만,
그나마 상좌의 상좌를 뒀으니
만암스님은 든든했을 것이다.

반대로 보면 수산스님은
사실상 만암스님의 상좌나
다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암스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암스님을
오랜 기간 모셨습니다.
만암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만암스님은
11살에 백양사로 출가했습니다.
당시 백양사에는
극락전과 요사채 뿐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수년간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가면서
17살에 <초발심자경문>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공부가 뛰어나
당대의 대강백인
환응탄영스님, 석전정호스님,
경운원기스님 등으로부터 경전을 배운 후
25살인 1900년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환응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또 행정에도 탁월했습니다.

백양사가 옛날부터 가난한 절인데,
3백석에 불과하던 재산을
7백석까지 불려 본사를 운영했습니다.

빚 하나 없이 했으니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실제로 만암스님은
계정혜 삼학(三學)을
갖춘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불교계에서도
“만암스님 모시고
백양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하면
다른 본사에서는
국수 삶아주고
떡도 해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지금도
“만암스님 같은 훌륭한 스님이
여럿 나와야 하는데, 아쉽다”고 한다.


만암스님께서
평소에 강조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만암스님은

△중노릇 잘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신심(信心)과
공심(公心)으로 살아라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하라

△삼보정재를
함부로 쓰지 말라
는 말씀을 항상 하셨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
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스님은 덧붙여
만암스님과의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하루는 만암스님이
수산스님을 불러
“중 승(僧)자를 쓸 줄 아느냐?”
고 물었다.
그래서 수산스님은
“사람 인(人) 변에 일찍 증(曾) 아닙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답을 말하자
칭찬은 커녕 호된 꾸중이 이어졌다.

만암스님은

“나이도 어린놈이
세속의 습(習)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어찌
사람도 안 된 것이 중이 될 수 있겠느냐?”

라고 호통을 쳤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만암스님은 수산스님에게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이다.
사람이 되고,
또 스스로의 주인이 돼야 한다.
사람도 못된 것들이 중을 해
세상이 시끄럽다”
고 질책했다고 한다.

-만암스님이
화두를 주셨는데,
어떻게 화두를 받으셨습니까?

“제가 강원을 마치고 나자
만암스님이
백양사 산내 암자인
청량원(淸凉(院)에 저를 머물게 하시며
말씀 하시기를

‘다 필요 없다.
죽었다 생각하고
이뭣고(是甚?) 화두를 참구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뭣고 화두에 몰입하게 되었고,
청량원에 머무는 1년여 동안
만암스님이
매일 아침공양을
청량원에서 드시면서
공부를 점검해 주셨습니다.

이뭣고는
말 그대로 이놈이 어떤 놈이냐,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어떤 놈이냐,
모든 것의 주체인
이놈이 어떤 놈이냐
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에 대한
의심을 가득 품지 않으면
화두가 잘 안 들릴 수 있습니다.

여러 화두가 있지만
나에게는
이뭣고 가 딱 걸렸습니다.”



-이후에도
수 십 년간 제방에서 정진하셨습니다.
만안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도 받으셨지요?

“이렇게 화두를 받아
1945년 동안거를
백양사 운문암선원에서
인곡스님을 조실로,
고암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비룡스님 등과 함께 정진하였고,
1946년 하안거를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보냈습니다.

만공스님은 제가 맘에 들었던지
저를 다른 선원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해 동안거부터
1948년 동안거까지는
인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다보사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때 상기(上氣)가 올라와
머리가 익어버릴 지경이 되자
인곡스님이
‘화두를 내려 놓아라’
고 하셨으나,
놓아지지 않아
그대로 화두일념에 맡겨두고 지내는 중에
도리가 밝아져

‘수중일월(袖中日月),
장악건곤(掌握乾坤)
-옷소매 속에 해와 달을 거두고,
손아귀에 하늘과 땅을 모아 쥐었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목포 정혜원에서
만암스님을 조실로,
서옹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주지소임을 보면서 안거를 보냈고,
1953년 가을에
만암스님에게
입실(入室)하여 전법게를 받았습니다.”

이때 스님은
만암스님으로부터
수산(壽山)이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만암스님이
수산스님에게 준 전법게는

‘고혜무견정(高侯無見頂)
사해부증간(四海不曾間)
염진언궁처(念盡言窮處)
외연일수산(巍然一壽山)

-얼마나
높은지 정상이 안 보이고,
사해가 일찍이 그 틈이 없네.

생각이 다하고 말이 끊어진 곳에,
외람되이
한 수산만 우뚝 나타났네’이다.

수산스님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만암스님의 인가(印可)였다.

전법게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수산스님이
만암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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