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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의 향기

[서옹스님] 참선[參禪]은 어떻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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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1-14 12:49 조회2,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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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은 어떻게 하는가
/서옹(西翁)대선사


그대 여여如如하신가?

“선禪은
어디로 들어가야 합니까?”

“저 개울 물소리가 들리느냐?”

“네, 잘 들립니다.”

“그럼 그리로 들어가자.”

진리란
흔들리는 물 속에 떠 있는 달과 같다.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면 어떻게 피합니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에 가면 된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추울 때는 그대를 춥게 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덥게 하면 된다.”


생각하면
도道는 곧 무너지느니라.

도道는 알고 알지 못하는데
속屬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망령妄靈된 깨침이요,

모른다는 것은
선善과 악惡
그 어디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생각하지 않는 도道야말로
훤하게 툭 터진 것이라
시비(是非)를 가릴 필요가 없다.

몸은 보리수와 다르고
맑게 할 거울도 없구나.

모든 것이 텅 비었는데
어디에서 먼지가 묻겠는가?

마음속에 이미
도道가 들어 있는데
무슨 수행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그 청정淸淨 한 마음을
오염(汚染) 시키지 말라.

보통사람과
성인聖人이 따로 없으며,
삶과 죽음이다르지 않다.

구별區別 하는 마음과
집착을 버리고
자연自然 스럽게 살아나가라.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차茶를 마신다.

“최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구구는 팔십일.”

경치가 좋은 산은
사람이 많아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골이 깊은 산은 사람이 지나지 않아
종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울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비친다.

그러나 거울은
어떤 물체가
앞에 나타나야 비치게 된다.

물체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거울에 물체가 비쳤다 하여
거울로부터 태어난 실물은 없다.

그저 비친 것뿐이다.
또한 물체가 사라졌다 하여
거울로부터 없어진 것은 없다.
그저 사라진 것뿐이다.

거울에 아름다운 꽃이 비쳤다.
그 비친 영상은 아름답지만
거울 자체는 아름답지않다.
더러운 것이 비쳤다 하여
거울 자체가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거울에 물체가 비쳤다 하여
거울 자체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물체가 사라졌다 하여
거울의 무게가 줄어들지도 않는다.

인간 본래의 마음은
어떤 악으로도 더럽히지 못하고
어떤 선으로도
그 이상 이익되게할 것이 없다.
이미 선악을 초월해 있다.

인간의 마음이 거울 같다고 하면
혹 그 마음속에
무엇인가 비치는 물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거울이란
한낱 비유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다.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무엇도
널 구속하기 어려운데
누가 널 어찌하겠느냐?

눈은 보는 것이고,
귀는 듣는 것이고,
코는 냄새 맡는 것이고,
입은 담론하는 것이고,
손은 잡는 것이고,
발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이들은 서로
차별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없으니 흔들림이 없다.

살아간다는 것이 깨달음이다.

참선參禪은
갈구渴求하는 것이 아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아무런 바람 없이 성성하게 있는 것,
아무런 걸림 없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하게 있는 것이다.

정해진 수행은 없다.
다만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
본래 성품을 느끼는 것이다.

“천년고목도 꽃을 피운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바로 깨달음의 장소이다.

밥 먹을 때 입 벌리고
잠 잘 때 눈 감는다.

얼굴 씻을 때 콧구멍 만지고,
신 신을 때 발뒤꿈치 만진다.
마땅하고 또 심甚히 마땅하나
아직 깨닫지 못했도다.
어찌하여 그런가?

흰 구름 다한 곳이
바로 청산靑山인데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구나.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얻는 자는 바로 얻어서
오랫동안
도道를 닦았다는 세월이 필요없다.

많은 사람들이
닦을 도道가 있다고 하나
도대체
무슨 도를 닦는다는 말인가.

몸과 입과 뜻이 하나가 되어야
도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봄 가랑비와 같이 많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길에서
도道를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제일로 도를 말하지 말라”
고 하였다.


참선參禪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움직이는 이놈이
‘뭘까’ 하고
자꾸 의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의심 덩어리가
해결하는 열쇠가 화두인데,
각자 화두를 들고
의심에 의심을
더하다 보면 눈이 열린다.

죽을 날짜가 코앞에 닥친
사형수가 도망가듯이
화두를 들어야 하고,
딴 생각이라곤 할 겨를이 없는
그 사형수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골똘히 해야 한다.

[疑團獨露]

임제 스님은 경전을 탐구하다가
‘말과 글은 약방문에 불과하다’
는 것을 깨닫고 참선을 했다.

그러니 참선 수행은
말로 이러니저러니
얘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직접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극하게 하면
생生과 사死를 벗어나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영원히 자유자재한
참나를 찾을 수 있다.

한바탕 부는
새벽바람 못 위로 스쳐오니
가을연꽃 물결에 흔들려
분홍옷을 벗는도다.

참선에 설명을 하면
틀리게 되어 있다.

올바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아주 작을 물고기는 우주를 삼키고,
지극히 작은 벌레는
수미산須彌山을 토吐해내누나.

떡장사를 하던 용담이
어느 날 천황도오 선사를
만나 출가하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선사를 모시면서
불법을 깨우칠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선사가
불법을 가르쳐주지 않자,
참다못한 용담은 불만을 털어놓았다.

“제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소원은 이루었지만,
화상께서는
불법의 심요心要를
지시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네가 내게 온 뒤로
너에게 불법의 심요心要를
보여주지 않은 적이 없다.”

“무엇이 화상和尙 께서
저에게 심요를 보여주신 것입니까?”

“네가 차를 가져오면
나는 차를 마시고,
네가 밥을 가져오면
나는 밥을 먹고,
네가 인사를 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무엇이 그대에게
심요를 보이지 않은 것인가?”

용담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기자 선사가 말했다.

“보려면
당장當場 볼 것이며,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이 말에 용담은
심요법문의 참뜻을 깨달았다.

“문 밖에서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

“빗방울 소리입니다.”

“너는 빗방울에
사로잡혀 있구나.”

“화상께선
저 소리를 무엇으로 듣는 것입니까?”

“자칫했으면 나도 사로잡힐 뻔했지.”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는 그래도 쉽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선善함과 악惡함은 경계境界가 없다.
경계를 만들면
선함도 욕망欲望이요
악함도 욕망이다.

어느 날
두 제자가 깃발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제자는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제자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켜보던
혜능[惠能] 스님이 말했다.

“깃발도 바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이다.”

“거지가 찾아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거지는
안팎으로 구하는 것이 없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햇빛 속의 산을 본다.”


“눈앞의 생사를
어찌해야 합니까?”

“생사란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한 뿌리이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두가 온몸이다.


혜해[慧海]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선사는 수도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까?”

“노력한다.”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잔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스님의 노력이 다릅니까?”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들은
밥 먹을 때
밥 먹는 일에 하나가 되지 않고,
잠잘 때도
잠자는 일에 하나가 되지 않고
이것저것을 생각한다.
그것이 다르다.”

“한 사람이 살아서 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서 따라간다.”
죽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어 있는 사람이 있다.

죽으면서 살든지,
살면서 죽든지는‘
지금 여기서’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구름이 산 위로 솟아나지만
가고 머무는 것에
아무 걸림이 없고
밝은 달이 공중에 달려 있으나
고요하거나
움직이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이 평화平和스러우면
말하지 않고
물이 평탄하면 흐르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지성과 감성으로 나눌 수 있다.
지성은 모든 것을
고정시켜서 분별하며,
불변한다고 믿고 사유한다.

그래서 단순하다.
그러나 감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화한다.
그래서 창조적이다.

무엇이든 정의하여 한정시키면
그것은 이미 생명체가 아니다.
정체하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다.

생생한 생명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
보고 듣고 말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그 자리가
바로 선(禪)의 자리이다.

감각이 있고,
감각을 지배하는 이성이 있고,
이성보다 더 깊은 자리에
영성(靈性)이 있다.

이 영성의
자리에 살자는 것이
참사람운동이다.

소중所重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이 걸린 데가 있고
내려가지 못하면
괴어서 썩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걸려서 고이게 되면
그건 곧 죽은 생명체가 됩니다.
결코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고 활발하게 사는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종교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철학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모든 인간에 걸리지 아니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우리 생명체는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다른 것들도
똑같은 입장立場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참모습은
생사도 없고 청정하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일체를 창조하며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늪에
놓아두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자유자재한 것이
참모습인 것을 깨닫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삶에 정진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제 봄이 되면
얼었던 물이 녹아 흐르고
꽃도 필 것입니다.

겨우내 보이지 않았던 새들도
즐거이 산을 찾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좀더 온유해질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아무런 욕심도 없고
부족함도 없으며
누구에게도 바라지 않고
자연은 그 자체로
넉넉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를 살았지만
무심한 풀들이나
바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않았어도,
갖지 않았어도,
치장하지 않았어도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깨우치게 합니다.

부처님의 모습과 마음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절로 알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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